문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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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역사적으로 중차대한 문묘 종사 인물을 정하는 일은 학통·당파·정치 정세 등에 따라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으며, 점향(點享)되거나 복향(復享) 되기도 하였으며, 위차(位次)가 바뀌는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반드시 [[중국]]의 예와 일치하지는 않았다.
 
[[정몽주]]는 [[고려 우왕|우왕]]과 [[고려 창왕|창왕]]이 신돈의 아들인 줄 알면서도 섬겼다는 이유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의심 받았다. [[조선 선조|선조]]와 [[광해군]] 년간 [[김굉필]]·[[정여창 (1450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 5현의 종사시에 [[김굉필]]은 절조(節操)와 경학(經學)이 뛰어났으나 짧은 생을 살다 죽어 [[성리학|성경]](誠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지 못하였다는 훈구파의 격렬한 반대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언적]]은 [[을사사화]] 때 처신으로 도덕성에 타격을 입고 출처에 대해 의심을 받았다. [[이황]] 또한 소년 시절 기생과의 행적이 들춰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이]]는 한때 [[불교]]에 몸 담았던 전력 때문에 학문의 순정성을 의심받고, [[성혼]]은 [[기축옥사]]와 [[임진왜란]] 때의 처신 때문에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둘의 위패가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 때 복향 되었으며, [[김장생]]은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축출될 때 출향되었다가 [[1717년]](숙종 43)에 다시 종향되었으며, [[영조]] 때의 [[송시열]]·[[박세채]]의 종사 때에도 많은 분쟁을 야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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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균관]]
 
== 함께같이 보기 ==
* [[종묘]]
* [[서울 문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