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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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은 극도로 피폐한 조선 말기의 생활불안과 억울한 감정에서 오는 위정자에 대한 반항이라는 평가도 있다. 비록 정부의 힘으로 평정되기는 하였으나, 정치의 폐단이 가시지 않고 [[1813년]](순조 13) 음력 11월에 제주도의 [[양제해]](梁濟海)의 음모 사건, [[1816년]](순조 16) 음력 10월 [[성천군]] [[성천군|성천읍]]의 [[승려]] [[학상]](學相)이 [[홍경래]]의 여당이라 자칭하며 사서 표현에 의하면 흉패한 행위를 한 것 등으로 보아 홍경래 난은 일시 돌발적인 군란(軍亂)이나 민란에 그치지 않았다. 그 여파가 파급되어 민중의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이 되었으며 철종 때 곳곳에서 민란이 계속되었던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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