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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릉 사건 ===
[[기원전 99년]] 무제의 명으로 [[흉노]]를 정벌하러 떠났던 장군 [[이릉]]이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보고받은 무제는 진노하여, 이릉의 처분 문제를 결정하기 위한 중신 회의 열었다. 신하 모두 이릉을 비난하고는 이릉의 가족 모두 [[능지|능지 처참]]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의 충절과 용맹을 찬양하고 두둔했기에 무제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사마천은 태사령의 직책에서 파면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사마천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당시 사형을 면하는 것은 두 가지 방법, 즉, 어마어마한 벌금을 내거나 [[궁형]]을 받는 것 둘뿐이었다. 이 벌금의 액수라는 것이 당시 기준으로 50만 전이었는데 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라서 정병 5천 명을 1년 동안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 총합<ref>5천 명의 병력의 녹봉, 숙식 비용, 장비 사용비용, 군마 관리비용 모두 총합한 금액</ref>과 맞먹는 금액이었다. 이 때문에 사마천이 태사령이라는 직책으로 받는 녹봉으로 이 벌금을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궁형을 받느니, 죽음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회 풍조였으나, 사마천은 《사기》의 완성을 위해 궁형을 받아들였다(궁형으로 인하여 고환이 제거되어 그의 초상화에는 수염이 없다). 궁형으로 죽음을 모면한 사마천은 아버지의 대부터 편찬중이었던 역사서 《사기》의 편찬을 완료하였다.
 
사실 이는 [[한 무제]]가 객관적인 평가를 한 게 아니라 [[이광리]]가 [[이릉]]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인데 이광리의 여동생이 한 무제의 후궁이었다.
 
=== 중서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