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 항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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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0일명동성당 대회시위 끝에사건에 명동성당에단호하게 들어간대처한다는 시위농성자들은방침을 사흘세우는 한편 시위농성을사태 벌였고,해결을 서울위해서 도심에서도적극적인 산발적인움직임을 시위가 터졌다보였다.<ref name="ReferenceB">{{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72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시위 사흘째, 도심내 산발적 시위[정태성]|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2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0837/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72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3월 5일|url-status =dead|확인날짜=2013년 dead7월 9일}}</ref> 그러자 당국은 명동성당 시위 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우는 한편 사태 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ref name="ReferenceB"/>
'''6월 민주 항쟁'''(유월 민주 항쟁, 六月民主抗爭) 또는 줄여서 '''6월 항쟁'''(유월 항쟁, 六月抗爭)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4·13 호헌 조치]]<ref>후임 대통령 역시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의 헌법으로 선출하겠다는 것으로, 개헌 요구를 전면 부정한 특별선언</ref>와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그리고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도화선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6·29 선언|수습안]] 발표로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이후 1987년 12월 16일 새 헌법에 따른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대한민국의 민주화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사회 운동이 비약적으로 상승하는 효과를 가져왔다.<br />
 
== 항쟁 이전 ==
=== 신군부 쿠데타 전후 ===
{{참고|12·12 사태|신군부|광주 민주화 운동}}
1979년 10·26 사건으로 17년간 독재정치를 펼치던 [[제4공화국]]의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고, 새로 취임한 대통령 [[최규하]]는 국민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밝힌다.([[서울의 봄]]) 하지만 이 기쁨도 잠시,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등을 비롯한 신군부([[하나회]])가 군사반란을 일으켜 군부 내 실권을 장악했다. 이후 전두환은 최규하를 로봇처럼 조종했고,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집권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광주광역시|광주]] 시민들이 [[5·18 광주 민주화 운동|민주화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시위 규모는 커졌고, 시위 참가자들도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이를 무력으로 유혈 진압하였다. 이후 전두환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해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으로 추대되어, 새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본문|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은 [[1987년]] [[1월 13일]] 자정 경 하숙집에서 [[치안본부]](現 경찰청) [[대공분실]]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되었다.<ref>{{웹 인용|제목=고 박종철열사 25주기 추모제|url=http://www.kdemo.or.kr/site/notification/event/925|출판사=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날짜=2011-12-29}}{{깨진 링크|url=http://www.kdemo.or.kr/site/notification/event/925 }}</ref>
 
‘대학문화연구회’ 선배이자 ‘민주화추진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수배 받고 있었던 [[박종운]]을 잡기위해 연행한 것이였다. 취조실에 연행해간 공안 당국은 박종철에게 [[박종운]]의 소재를 물었으나, 박종철은 순순히 대답하지 않았다. 이에 경찰은 잔혹한 폭행과 전기고문, 물고문 등을 가하였고, 박종철은 끝내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대공수사단 남영동 분실 509호 조사실에서 사망했다. 11시 45분 경 중앙대 용산병원으로 옮겨졌는데 의사가 검진했을 당시 이미 숨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 라고 사망원인을 발표하였다.
 
[[2월 7일]] 전국 주요 도시에서 "박종철군 범국민추도식" 및 도심 시위가 열렸고, 이어 [[3월 3일]]에는 "'''박종철군 49재와 고문추방 국민대행진'''"과 함께 또 다른 시위가 열렸다. 이후 [[4월 2일]] [[서울대학교]] 학생들의 학부모 130여 명이 [[건대항쟁|건국대학교 사태]] 등 시국관련 구속학생의 징계철회를 요구하며 철야 농성을 벌였다.
 
=== 정부의 개헌논의 유보 ===
하지만, 전두환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1987년 4월 13일, 그는 '대통령 특별담화'를 발표,<ref name="imnews.imbc.com">{{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46_6035.html|제목 = [전두환대통령 특별담화]임기 만료 후 후임자에게 정부 이양|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4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4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50402115046/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46_6035.html|보존날짜 = 2015년 4월 2일|url-status = dead}}</ref> 개헌(改憲) 논의를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인용문|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본인의 이 결단은 오늘의 망국을 타개하고 국가 목표를 수행하는 데 현실적으로 최선의 길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전폭적인 도움과 신뢰를 보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하고자 합니다. 2가지의 국가 대사를 완성한 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개헌 문제를 다시 생각한다면 나라의 백년대계를 위한 좋은 방안이 발견될 수 있을 것으로 본인은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제 우리의 정치도 나라와 사회 성장발전에 부응하는 선진 정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신념에서 본인은 남은 기간 동안 민주발전의 기반을 더욱 넓히고 사회 안정과 국민 화합을 다지기 위한 조치들을 더욱 과감하게 추진해 나가고자 합니다. 그러한 노력의 하나로 본인은 국민의 정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지방자치제를 강제적으로 실시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 문제가 조속히 매듭지어져서 본인의 임기 내에 지방 자치가 시작된다면 민주 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튼튼한 토대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제는 우리의 정치도 시대의 변천과 사회의 발전에 따라 꾸준한 신진대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낡은 시대의 낡은 사고방식에 젖어 있는 인물에게 발전하는 나라의 장래를 의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전환기의 정치를 이끌어나갈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 신진들을 광범위하게 포용하고 육성하는 정당의 노력은 매우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1987년 4월 13일 대통령 전두환<ref name="imnews.imbc.com"/>}}
 
이후 전두환은 대통령 선거인단 선거와 대통령 선거는 1987년 내에 공정한 선거관리를 통해 자유 경선의 분위기가 보장되는 가운데 차질없이 실시할 수 있게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다짐했으며, 또 민정당의 후임 대통령 후보는 조속한 시일 안에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인물 가운데서 당헌 절차와 민주 방식에 따라 전당대회에서 선출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ref>{{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50_6035.html|제목 = [전두환대통령 특별담화]대통령 선거인단, 선거 연내 실시 [윤종부]|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4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4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616171326/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50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6월 16일|url-status = dead}}</ref>
 
하지만, 이는 '호헌 조치'라는 그 이름대로 현행 헌법에 따라 권력을 이양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큰 기대를 얻을 것이라 믿었으나,<ref>{{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57_6035.html|제목 = [전두환대통령 특별담화]담화 발표에 국민들 기대 가져[안재기]|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4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4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1229043622/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802857_6035.html|보존날짜 = 2014년 12월 29일|url-status = dead}}</ref> 기대는커녕 오히려 반발을 가져오는 요인이 되고 말았다. 곧바로 이튿날인 [[4월 14일]]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 등 각계 인사들이, 호헌 조치를 비판하는 시국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 ===
군사정권의 억압속에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는 분위기가 높아졌지만, [[신한민주당]]의 [[이민우 (1915년)|이민우]] 총재, [[이철승]] 등은 당시 정부의 내각제 개헌에 대해 지지의사를 밝혔다. 이에 반발한 [[김영삼]], [[김대중]] 등은 70여명의 의원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 창당을 추진하였다.
 
이에 전두환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1987년]] [[4월 20일]]부터 [[4월 24일]]까지, 통일민주당의 20여개 지구당에 폭력배들이 난입하여 기물을 부수고 당원들을 폭행하는등 난동을 부렸으며, 이로 인해서 창당대회는 인근 식당이나 길거리에서 약식으로 치러졌다. 통일민주당 측은 처음 이 일은 정부가 개입한 비열한 정치공작이라 규탄하고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였으나, 수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 경찰 최루탄에 의한 이한열 사망===
1987년 [[5월 17일]], 노동자였던 황보영국은 부산상고(현 개성고) 앞에서 '독재타도' 등을 외치며 분신했으며, 일주일 뒤 사망하였다.<ref>이상민·박진국·전대식,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605/010020070605.1005105952.html 시민이쓰는 6월항쟁 - (6) 청춘 불사른 황보영국씨] {{웨이백|url=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7/0605/010020070605.1005105952.html |date=20111124030600 }}, [[부산일보]]</ref> 이튿날인 [[5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광주항쟁 7주년 미사에 [[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되었음을 폭로하였다.<ref>상세한 것은 [[박종철]] 참조.</ref><ref>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경찰에 의해 축소·은폐된 사실은 박종철의 삶을 소재로 정하여 제작한 [[문화방송]] 드라마에서 고발된 적이 있다.</ref> 이에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정권을 비판하던 국민들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옳지 못함에 크게 분노하였고, 이후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자주 일어났다. 이후 [[5월 23일]] "'''박종철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들은 [[6월 10일]]에 규탄대회를 갖기로 결정하였다(그날은 노태우가 민정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날이기도 하다).
 
전두환은 후계자로 국무총리 노신영을 지명했으나, [[5월 26일]] 고문치사사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신영]] 국무총리를 경질하였다. 이후 [[이한기]]를 신임 총리로 교체하였다. 이튿날 전국의 재야지도자 2200여 명이 함께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였고, [[한국 기독교 장로회]] [[향린교회]]에서 발기인 대회<ref>향린교회에서는 이 사건을 기념패로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ref> 를 열었고, "호헌 조치 철회 및 직선제개헌 공동쟁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를 향린교회에서는 교회문에 기념패를 만들어 기억하고 있다.
 
[[6월 9일]] 이 과정에서 시위대 앞에서던 [[연세대학교]] 학생인 [[이한열]]이 학교 앞 시위 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부상([[7월 5일]] 사망)을 입었다. 이 사건은 당시 한 미국인 기자에 의해 포착되어 신문에 올라가면서 전 세계적으로 이목을 끌게 되고, 이 사건은 시위의 규모를 더욱 커지게 만드는 사건이 된다.
 
== 6월 민주항쟁 시위의 진행 ==
=== [[6월 10일]]===
 
1987년 6월 10일 잠실체육관에서 [[민주정의당]] 제4차 전당대회 및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 개회가 열렸고, 노태우는 이 대회에서 민정당의 제13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ref>{{웹 인용|url=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582_6035.html|제목=[6.10 민정당전당대회] 전당대회 및 대통령후보 지명대회[강성구]|저자=MBC뉴스데스크|날짜=1987-06-10|확인날짜=2013-05-0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20095745/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582_6035.html|보존날짜=2013-10-20|url-status=dead}}</ref>
 
그러나 같은 날 전국에서 반정부 [[민주화]] 시위가 일어난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주최로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ref>현재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은 이 사건을 6.10민주항쟁 발생지라고 새긴, 돌로 만든 조형물로 기념하고 있다.</ref> 이를 대한성공회 서울교구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는 '6월 민주항쟁 발생지'기념비를 만들어 기억하고 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는 오후 6시를 기해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한 민중항쟁의 뜻으로 차를 세워서 경적을 울려줄 것 또는 흰 손수건을 흔들어 달라고 지침을 내리어 [[택시]]운전노동자들의 경적소리와 [[시내버스]]에서 흰 손수건을 흔드는 시민들이 줄을 이었다.
 
여고생들은 민중항쟁 참여자에게 마실 [[물]]과 [[도시락]]을 가져다 주는 등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원을 하여 서울도심에서 민중항쟁이 진행될 수 있었고, 특히 명동성당 농성 당시 성당 옆 [[계성여고]] 등에서 도시락과 물 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농성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는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때 [[피아노]]를 연주할 [[전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성공회 대성당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 [[6월 11일]] ===
재야와 시민단체의 시위가 터지자, 치안당국은 전날 있었던 야권의 집회는 '폭력성을 드러낸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하였고, '앞으로도 법질서 파괴 행위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다.<ref name="ReferenceA">{{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28_6035.html|제목 = 치안본부, 야권집회 불법으로 간주. 질서 파괴 엄단[김진원]|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1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513025847/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28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5월 13일|url-status = dead}}</ref> 당시 치안본부장이었던 [[권복경]]은 야권의 집회와 관련한 발표를 통해서 주최 측이 비폭력집회를 열겠다고 공언하고도 전국에 걸쳐 폭력적 난동사태를 유발한 것은 법질서 유린행위였다고 지적했다.<ref name="ReferenceA"/>
 
이 날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대학생 등 6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하며 1주일 째 시위를 계속했고, 남대문시장 등 명동 외곽 지대에서조차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ref>{{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29_6035.html|제목 = 오늘 대학생 중심 명동일대 산발적 시위[강성구]|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1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102200856/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29_6035.html|보존날짜 = 2014년 1월 2일|url-status = dead}}</ref>
 
=== [[6월 12일]] ===
6월 10일 대회 끝에 명동성당에 들어간 시위농성자들은 사흘 째 시위농성을 벌였고, 서울 도심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터졌다.<ref name="ReferenceB">{{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72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시위 사흘째, 도심내 산발적 시위[정태성]|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2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0837/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672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3월 5일|url-status = dead}}</ref> 그러자 당국은 명동성당 시위 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우는 한편 사태 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ref name="ReferenceB"/>
 
명동성당을 점거한 뒤 시위를 벌여온 농성자들은 당초 600여 명에서 350여 명으로 숫자가 줄어들었으나, 경찰의 해산 종용에도 불구하고 계속 농성을 벌였다.<ref name="ReferenceB"/> 시위 농성자들은 11일과는 달리 바리케이트를 철거하고 극렬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성당을 점거한 채 농성을 풀지 않고 계속 경찰과 대치하였다.<ref name="ReferenceB"/>
 
하지만 오후가 되자 시위의 규모는 커졌다. 오후 1시 쯤에는 코스모스 백화점 앞에서, 오후 5시 무렵부터는 각 대학에서 시내로 나간 학생들이 명동을 중심으로 롯데 쇼핑 앞과 중앙극장 앞, 삼일 고가도로, 을지로, 광교 사거리, 시청 주변 등에서 기습 시위와 해산을해산을는 거듭했다가운데, 정부와 [[민주정의당|여당]]은 당정회의를 잇달아 열어서 6.10 대회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시위 사태에 대처 방안을 논의하였으며, 사회혼란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했다.<ref>{{웹 인용|url name="ReferenceB"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3_6035.html|제목 = [명동시위]고위시국대책회의, 시위 대책 논의[김석진]|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2151/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3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3월 5일|url-status = dead}}</ref>
 
=== [[6월 13일]] ===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와 [[민주정의당|여당]]은 당정회의를 잇달아 열어서 6.10 대회 이후에 계속되고 있는 시위 사태에 대처 방안을 논의하였으며, 사회혼란 행위에 대해서는 강력히 대응하기로 결정했다.<ref>{{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3_6035.html|제목 = [명동시위]고위시국대책회의, 시위 대책 논의[김석진]|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2151/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3_6035.html|보존날짜 = 2016년 3월 5일|url-status = dead}}</ref>
 
한편 [[명동성당]]은 별다른 충돌 없이 [[혼인성사|혼배성사]]와 [[미사]]가 예정대로 열리는 등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팽팽한 긴장은 계속되었다.<ref name="ReferenceC">{{웹 인용|url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7_6035.html|제목 = [명동시위]명동성당 농성 나흘째, 결혼식 및 미사 거행[정태성]|저자 = MBC뉴스데스크|날짜 = 1987년 6월 13일|확인날짜 = 2013년 7월 9일|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50521110156/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7/1791707_6035.html|보존날짜 = 2015년 5월 21일|url-status = dead}}</ref> 성당을 점거하고 있는 350여 명의 시위 농성자들은 오전 9시와 11시 50분 두 차례에 걸쳐 경찰저지선 50m앞까지 진출해 반정부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ref name="ReferenceC"/> 하지만 농성자들이 돌이나 화염병을 던지지 않았고, 경찰도 최루탄을 쏘지 않아 서로가 자제하는 모습이 역력했다.<ref name="ReferenceC" /> 평화적인 모습이 계속되었으나 점거학생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연행, 구속된 사람들이 전원 석방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오후 2시부터는 서울지역 200여 명의 천주교 사제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대책회의를 열고 학생들을 지지하고 보호하겠다는 전날의 성명을 재확인했다보호하겠다.<ref name="ReferenceC" />
 
=== [[6월 14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