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디가: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TedBot (토론 | 기여)
잔글 봇: 인용 틀 구식 변수 정리
잔글 →‎top: 봇: 깔끔하게! ;) using AWB
2번째 줄:
'''바르디 가'''(Bardi)는 [[콤프나 데이 바르디]]라는 강력한 [[은행]]으로 시작한 [[피렌체]]의 영향력 있는 가문이다. 14세기에 바르디 가는 [[에드워드 3세|잉글랜드의 군주 에드워드 3세]]에게 900,000 [[플로린]]을 빌려줬고, 이 빚을 [[페루치 가]]에 빌린 600,000 플로린과 함께 갚지 못하게 되면서, 두 가문 은행의 부도로 이어졌다. 15세기 동안 바르디 가는 여러 중심지에서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존 캐벗]]을 포함한 [[아메리카]] 초기 탐험에 일부 경제 지원 역할을 했었다.{{sfn|Guidi-Bruscoli|2012}}
 
바르디 가의 귀족 지위는 1164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자손들에게 귀족 작위를 물려줄 권리"와 함께 [[베르니오]] 백작령을 알베르토 백작에게 넘겨준 이래로 기록되었다.{{sfn|Grazia Pernis|Schneider Adams|2008}} 알베르토 혈통의 마지막 계승자인 마르게리타 여백작은 베르니오를 사위인 피에로 데 바르디(Piero de' Bardi)에게 매각했다. 알베르토 가의 재산은 [[무겔로]]가 맞닿은 피렌체에서 22마일 떨어진 성 한 채와 9개의 코무네가 포함되어 있었다. 14세기 기간에 바르디 가는 [[피렌체]] 정부가 그들을 위협으로 간주할 만큼 강력한 세력이 되었다. 그들은 결국 "피렌체 근처의 요새화 된 성들이 공화국의 위험으로 여겨" 결국 피렌체 정부에 그들의 성을 팔아야 만했다.{{sfn|Grazia Pernis|Schneider Adams|2008}}
 
1290년대 바르디 가와 페루치 가는 [[잉글랜드]]에도 지사를 세웠고 1320년대에는 유럽의 주요 은행가였다. 14세기에 바르디 가와 페루치 가는 금융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엄청나게 부유해졌다.<ref name="ReferenceA">[[#Banking in the Middle Ages|Banking in the Middle Ages]] (1997)</ref> 이 두 가문들은 오늘날 [[수표]]라고 알려진 환어음을 상인들에게 제공하여 무역을 촉진시켰다. 이렇게 간단히 만들었던 이유는 한 도시에서 채무자가 지불 한 돈이 다른 도시에 청구서를 제출함으로써 채권자에게 지불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ref name="ReferenceA"/><ref>[[#History of Banking|History of Banking]] ''/www.historyworld.net''</ref><ref>[[#Banking in the Middle Ages|Banking in the Middle Ages]] (1997)</ref> 1338년에는 피렌체에 80개가 넘는 은행 건물이 생겨났다.<ref>[[#Banking in the Middle Ages|Banking in the Middle Ages]] (1997)<name="ReferenceA"/ref> 바르디 가는 [[바르셀로나]], [[세비야]], [[마요르카]], [[파리]], [[아비뇽]], [[니스]], [[마르세이유]], [[런던]], [[브뤼허]], [[콘스탄티노플]], [[로도스]], [[키프로스]], [[예루살렘]]등에 13개의 지사를 설치했다.<ref name="historyworld.net">[[#History of Banking|History of Banking]] ''www.historyworld.net''</ref> 일부 유럽의 강력한 지도자들은 바르디 가에 부채를 지기도 했다. 이것은 은행가의 몰락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ref>[[#History of Banking|History of Banking]] ''www.name="historyworld.net''<"/ref>
 
1340년대 초 [[백년전쟁]] 기간에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와의 값비싼 전쟁으로 바빴다. 그는 페루치 가에 600,000 플로린, 바르디 가에 900,000 플로린을 빌렸다. 1345년에 그가 그의 빚을 채무하지 않으며, 두 은행가의 [[파산]]으로 이어졌다.<ref>[[#History of Banking|History of Banking]] ''www.name="historyworld.net''<"/ref>
은행업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바르디 가는 이탈리아의 가장 성공한 상인들 중 하나였고 그들의 귀족 지위를 통해 이익을 계속 누렸다. 많은 가문 출신들이 [[십자군]], 교황청 로마 [[대사 (외교관)|대사]], 일부는 [[기사]]가 되는 등 중요 직위를 차지했다.{{sfn|Grazia Pernis|Schneider Adams|2008}} 1415년 경 [[코시모 데 메디치]]와 [[콘테시나 데 바르디]]의 결혼은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의 권력을 세우는데 핵심 역할을 했다.{{sfn|Tomas|2003|p=16-17}} 코시모는 바르디 가에게 1434년에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회복시켜주려던 그들의지지에 보답했다.{{sfn|Tomas|2003|p=17}} 1444년 그는 그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었다.{{sfn|Tomas|2003|p=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