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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도는 미수에 그쳤으나, 이 사건 이후에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하여, 박정희는 ‘국가안보 우선주의’를 선언하였다. 안보우선주의는 [[노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 근거가 되었으며,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대한민국]]은 특수부대인 [[684 부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보복성 공격을 계획하였으나, [[미국]]과 [[소련]] 사이에 [[데탕트]]가 조성되면서 불발에 그쳤다.<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031203020205291 주석궁 대신 청와대로] 한겨레21, 2003.12.3.</ref>
 
몇일후며칠 후 일어난 푸에블로호 사건과는 달리 미국의 반응이 적극적이지 않았고 한국군 단독으로 작전통제 필요성이 부각되자 박정희는 미국에 작전권 환수를 처음으로 요구했다<ref>{{웹 인용|url=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021300329201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8-02-13&officeId=00032&pageNo=1&printNo=6874&publishType=00020|제목=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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