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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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종'''(景宗, [[1688년]] [[11월 20일]]([[음력 10월 28일|<small>음력 10월 28일</small>]]) ~ [[1724년]] [[10월 11일]]([[음력 8월 25일|<small>음력 8월 25일</small>]]), 재위: [[1720년]] [[7월 17일]] ([[음력 6월 13일|<small>음력 6월 13일</small>]])<ref>《경종실록》《景宗實錄》 1권</ref> ~ [[1724년]] [[10월 11일]] ([[음력 8월 25일|<small>음력 8월 25일</small>]])<ref>《경종실록》《景宗實錄》 15권</ref>)은 [[조선]]의 제20대 [[왕|임금]]이다. [[성]]은 [[이씨|이(李)]], [[휘]]는 윤(昀), [[본관]]은 [[전주이씨|전주(全州)]], [[자 (이름)|자]]는 휘서(輝瑞), 묘호는 '''경종'''(景宗), 시호는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이다.
 
==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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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죽음 및 능묘 ==
[[1724년]] 10월 6일 (음력 8월 20일) 경종은 식사로 [[게장]]과 생감을 먹은 후 심각한 복통과 설사, 구토 증상이 나타났다. 10월 10일에는 의식마저 혼미해진 상황에서 18시경(酉刻)에 왕세제 [[조선 영조|연잉군]]이 인삼과 부자(附子)를 경종에게 올렸다. 이공균 등 의원들이 인삼을 쓰면 경종이 기(氣)를 되돌리지 못하여 상태는 더 악화될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연잉군은 인삼과 부자를 처방했고, 이러한 처방에도 경종의 상태는 더 악화되었다.
 
[[1724년]] [[10월 11일]] 오전 3시경(경종 4년 [[음력 8월 25일]] 축각(丑刻)) 경종은 [[창경궁]](昌慶宮) 환취정(環翠亭)에서 재위한 지 4년 2개월 만인 향년 37세를 일기로 훙(薨) 하였다.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 (조선 경종)|의릉]]에 안장되었다. 경종의 태실비(탯줄을 묻은 곳)는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괴동리 소재에 있다.
 
=== 독살설 ===
경종이 갑자기 사망하자 병사가 아닌 독살 당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단의왕후]]의 남동생 [[심유현]] 등 소론 과격파를 통해 돌기 시작했다. 소론 과격파는 삼수의 변 등 과거 경종 암살 세력과 연관이 있던 왕세제 [[조선 영조|이금]]에게 주목했고, 특히 연잉군이 올린 인삼 부자를 먹고 경종이 사망한 점을 주목해 연잉군이 경종을 독살 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소문이 와전되어 연잉군에게 게장과 생감을 먹여 죽였다는 형태로 소문이 퍼진다(경종이 게장과 생감을 먹은 뒤 앓다가 죽은 것은 실록등의 기록에서 확인되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왕세제 이금 올렸다는 기록은 없고 가능성도 부족하다)
 
경종 사후 이 독살설은 소론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김일경]]의 모의 사건을 시작으로 이천해의 난동, 청주성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인좌의 난]], [[나주괘서사건]] 등 반 오랜시간 영조의 정통성 시비문제로 비화되었다. 그 중 [[나주괘서사건]]의 주모자 신치운(申致雲)은 영조가 자신을 친국 할 때 '신은 갑진년(172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습니다.'<ref>영조실록, 영조 31년(1755) 5월 20일(계사) 2번째 기사</ref>라며 경종 독살 설을 비꼬아서 대답했고 이 이야기를 들은 영조가 분통 하여 눈물을 흘릴 정도였으며, [[1754년]](영조 30년) 에 영조는 경종을 자신이 독살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해명하는 [[천의소감]]을 남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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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 ==
{| class="wikitable"
! rowspan="2" | 조선 제20대 국왕 
| rowspan="2" |''' 경종''' 景宗 
!출생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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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 ===
{| class="wikitable"
! colspan="2" |
!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