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요시노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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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로쿠 16년([[1703년]]) 1월, 형인 5대 번주 [[소 요시미치|요시미치]](義方)로부터 8백 석(石)을 하사받고 따로 분가하여 우지에 가(氏江家)를 세우는 동시에 요시미치로부터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서 '''우지에 미치노부'''('''氏江方誠''')라고 칭하였다. [[교호]](享保) 3년([[1718년]]) 형 요시미치가 사망하면서 그의 양자로써 쓰시마 소 가문의 가독(家督)을 잇고 쓰시마 후추 번 6대 번주가 되어 '''소 요시노부'''('''宗義誠''')로 이름을 바꾸었다. 12월에는 종4위하 시종(侍従) ・ 쓰시마노카미(対馬守)로 서위(叙位) ・ 임관되었다.
한국의 《
쓰시마 후추 번의 재정을 일으키기 위해 검약령(倹約令)을 내리는 등 여러 가지 시책을 시도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쓰시마 후추 번의 재정난을 더욱 부추겼을 뿐이다. 교호 15년([[1730년]]) 11월 6일에 자신의 적남(嫡男)인 [[소 요시유키|요시유키]](義如)를 데리고 [[에도]](江戸)로 나아가던 도중에 [[오사카]](大坂)에서 병으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향년 39세. 요시유키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동생인 [[소 미치히로|미치히로]](方熈)가 양자로써 뒤를 이었다.
한국의 《변례집요》권제1 별차왜(別差倭)조에는 영조 6년인 경술년(1730년) 11월 6일에 죽은 옛 도주(소 요시노부)의 고부차왜(告訃差倭)로써 등영통(藤英通)이 조선에 와서 소 요시노부가 작성한 유언장과 유품을 가져왔다고 적고 있다.
== 요시노부에게서 이름자를 받은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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