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요시노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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겐로쿠 16년([[1703년]]) 1월, 형인 5대 번주 [[소 요시미치|요시미치]](義方)로부터 8백 석(石)을 하사받고 따로 분가하여 우지에 가(氏江家)를 세우는 동시에 요시미치로부터 이름자 한 글자를 받아서 '''우지에 미치노부'''('''氏江方誠''')라고 칭하였다. [[교호]](享保) 3년([[1718년]]) 형 요시미치가 사망하면서 그의 양자로써 쓰시마 소 가문의 가독(家督)을 잇고 쓰시마 후추 번 6대 번주가 되어 '''소 요시노부'''('''宗義誠''')로 이름을 바꾸었다. 12월에는 종4위하 시종(侍従) ・ 쓰시마노카미(対馬守)로 서위(叙位) ・ 임관되었다.
 
한국의 《증정교린지[[변례집요]](邊例集要)에는 조선 숙종 47년([[1721년]])에 전임 도주 종의방(宗義方, 소 요시미치)의 죽음을 조문 및 위로하고, 종의성(宗義誠, 소 요시노부)의 승습(承襲)을 축하하기 위하여 3월 11일 당상역관 최상집(崔尙㠎)과 당하역관 이장(李樟)이 포함된 88명<ref>《화교각서(和交覺書)》에는 65명으로 되어 있다.</ref>의 문위행 사절단이 쓰시마로 파견되었다고 되어 있다. 3월 18일에 도착한 조선의 문위행은 6월 18일까지 후추에 머무르고 7월 12일 귀국하였는데, 당상역관 최상집 일행은 대부분의 사행원들이 가담한 문위행 사절단 최대의 밀무역 사건을 일으킨다. 이후 문위행 인원에 대한 통제와 사행원의 몸수색 등에 대한 새로운 규정들이 제정되기에 이르렀다.<ref>다시로 가즈이(田代和生), 〈도해역관사의 밀무역〉《조선학보》150, 1994년</ref>
 
영조 8년(1732) 9월 11일 종방희(宗方熙)가 도주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종의성(宗義誠)의 장남인 종의여(宗義如)가 뒤를 이었으며, 영조 9년(1733) 5월 16일 의여가 대마도로 돌아왔다. 84명으로 편성된(《화교각서(和交覺書)》에는 65명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외에 19명이 스스로 체재비용을 부담하였다고 적혀 있다.) 문위행은 영조 10년(1734) 1월 12일 도해하여 18일부터 3월 24일까지 부중(府中)에 체류한 뒤 4월 13일 귀국하였다. 재판차왜 평방경(平方敬)이 호행ㆍ호환하였다. 《宗氏家譜略 義如君》 《邊例集要 卷18 渡海》 《裁判記錄》 한편 《동문휘고(同文彙考)》 부편(附編) 권4 고경(告慶)과 권6 고부(告訃)에 남아 있는 서계를 보면 이들 문위행은 종의여의 승습 축하 및 환도(還島) 문위, 종방희의 퇴휴(退休) 문위, 종의성의 신사(身死) 조문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쓰시마 후추 번의 재정을 일으키기 위해 검약령(倹約令)을 내리는 등 여러 가지 시책을 시도하였으나 효과를 거두지 못했고, 오히려 쓰시마 후추 번의 재정난을 더욱 부추겼을 뿐이다. 교호 15년([[1730년]]) 11월 6일에 자신의 적남(嫡男)인 [[소 요시유키|요시유키]](義如)를 데리고 [[에도]](江戸)로 나아가던 도중에 [[오사카]](大坂)에서 병으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향년 39세. 요시유키의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동생인 [[소 미치히로|미치히로]](方熈)가 양자로써 뒤를 이었다.
 
한국의 《변례집요》권제1 별차왜(別差倭)조에는 영조 6년인 경술년(1730년) 11월 6일에 죽은 옛 도주(소 요시노부)의 고부차왜(告訃差倭)로써 등영통(藤英通)이 조선에 와서 소 요시노부가 작성한 유언장과 유품을 가져왔다고 적고 있다.
 
== 요시노부에게서 이름자를 받은 인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