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48번째 줄:
[[1595년]] 고성 지방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하여 선조로부터 충용군이란 군호를 받았다. 이후 장문포에서 충무공 이순신과 수륙 연합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진해 고성 지방을 방어하였다.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여러 차례 걸쳐 왜군을 무찌름으로 위명이 높아갔다.
 
[[1596년]]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다.<ref name='ss290201'>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902001_004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무술 4번째기사 잡아다가 국문하던 의병장 김덕령을 특명으로 석방시키다] </ref> 또한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는데,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윤근수의 앞에서는 수락하였다가 그가 떠나자 그 종의 아비를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ref name='ss290201' /> 게다가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ref name='ss290201' />
[[1596년]]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거절하였고,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고 사헌부에서 처벌을 간하였으나 선조의 명으로 풀려났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1013_001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3일 경진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과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ref> 이후 담양에서 출발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하고 있던 중 그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의 원성이 조정에 전해지자 김덕령은 부하장졸에게 가혹한 군률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우의정]] [[정탁]](鄭琢)이 그의 공적을 칭송하며 석방을 탄원하는 등 정탁이 사면 요청하여 석방된다.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고 사헌부에서 처벌을 간하였으나, 선조의 특명으로 풀려났으며,<ref name='ss290201' /><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1013_001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3일 경진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과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ref> 선조는 김덕령에게 전마(戰馬) 1필을 주었으며,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평하기를, “이제 보니 하나의 돌격 장령(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할 뿐 대장을 삼기엔 가합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1596년]]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거절하였고,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고 사헌부에서 처벌을 간하였으나 선조의 명으로 풀려났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1013_001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3일 경진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과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ref> 이후 담양에서 출발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하고 있던 중 그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의 원성이 조정에 전해지자 김덕령은 부하장졸에게 가혹한 군률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우의정]] [[정탁]](鄭琢)이 그의 공적을 칭송하며 석방을 탄원하는 등 정탁이 사면 요청하여 석방된다.
 
=== 이몽학의 난과 압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