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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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고려 조정은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나라와, 안으로는 친원파와 친명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고려는 [[요동]]을 정벌하기 위해 [[최영]]을 중심으로 요동 정벌군을 편성하였다. 이때 우군 도통사를 맡았던 이성계는 좌군 도통사 [[조민수]]와 상의하여 [[평양]]에 있던 최영에게 회군을 청했다. 그러나 회군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성계와 조민수는 [[1388년]] [[음력 5월 20일]] 군사를 수도로 돌려 쿠데타를 일으켰다([[위화도 회군]]). 이성계는 쿠데타로 정권을 잡아 최영 세력을 숙청하고 [[우왕]]을 폐위한 뒤 [[창왕]]을 왕위에 올렸다. 동시에 [[정도전]] 등 신진 사대부들과 손잡고 [[과전법]]과 같은 전제 개혁 등 여러가지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창왕을 다시 폐하고 [[고려 공양왕|공양왕]]을 왕위에 올렸다. 소위 [[폐가립진|폐가입진]](廢假立眞)으로,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식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므로 폐하고, 진짜 고려 왕씨를 왕으로 삼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사전 개혁]](私田改革)을을 단행하고 [[과전법]](科田法)을 공포하였다. 전제 개혁으로 인하여 이성계·정도전·조준 등은 막대한 과전을 받게 되었으나, 권문세족들은 농장을 몰수당함으로써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었다. 한편 공전(公田)의 증대는 국가의 수입을 증대시켜 새로운 왕조 조선의 경제적 기초를 확립케 했다.
 
위화도 회군에서 정권과 군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전제 개혁을 단행하여 경제적인 실권까지도 장악하던 중 [[1392년]]에는 이성계의 5남인 [[조선 태종|이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해 [[음력 7월 17일]] 개경의 수창궁(壽昌宮)에서 공양왕의 왕위를 물려받아 새 왕조를 개국하여 태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