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창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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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유교([[성리학]])
|배우자= 청풍군부인 [[청풍 정씨]](淸風郡夫人 淸風 鄭氏)
|직책2 = 조선국 의정부 영의정 겸 섭정승<br>(朝鮮國 議政府 領議政 兼 攝政丞)
|임기2 = [[1476년]] [[7월 31일]] ~ [[1476년]] [[8월 26일]]
|군주2 = [[조선 성종|조선 성종 이혈]]
|군주 = [[조선 세종|조선 세종대왕 이도]]
|섭정 = [[황희|영의정 황희]](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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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
'''정창손'''(鄭昌孫, [[1402년]] [[3월 11일]] ~ [[1487년]] [[1월 27일]])은 조선국 승문원 예하 부정자·조선국 의정부 영의정 겸 섭정승 등을 지낸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언어학자, 유학자이다.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이었으며 [[훈민정음]] 창제 당시 [[훈민정음]]에 반대한 [[집현전]] 학사의 한사람이었다. [[1456년]]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1468년]](예종 1년) 익대공신(翊戴公臣),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佐理公臣) 등에 세번 녹훈되었다. 봉원군(蓬原君)에 봉군되었다가 [[1456년]]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으로 진봉됐다.
 
[[조선 세종|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사가 되었고, [[1449년]] [[부제학]]으로 [[춘추관]][[편수관]], [[수사관]](修史官)을 겸직하며 《고려사》, 《고려사절요》, 《세종실록》, 《치평요람》 편찬에 참여하고 세 번 과거에 합격했다. [[1443년]] 집현전교가 되었는데 재직중인 이듬해 한글의 제정을 반대하다가 파직, 투옥되었다가 풀려났고 [[1446년]]에는 [[세종]]이 불경(佛經)을 간행하려 하자, 왕실의 불교 숭상을 강력히 반대하다 다시 좌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