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임진왜란과 의병 조직: 형조좌랑은 추증임.
40번째 줄: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 발생초에 의병을 일으키코자 하였으나 노모의 봉양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그는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을 찾아가, [[고경명]]의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그러나 형 김덕홍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고 노모마저 1593년 8월에 세상을 떠나자 본격적으로 의병활동에 가담하였다.
 
[[1593년]] 어머니의 상중에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세력이 크게 떨치자, 아울러 장성현감 이귀(李貴),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의 추천으로 [[선조]]로부터 표창을 받고받아서, 형조좌랑의이듬해 1월 5일 [[선전관]]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이때 아직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고관에 제수하지는 못하였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wna_12701005_001 선조실록 78권, 선조 29년 8월 4일 기해 3번째기사 1596년 죄인 김덕령을 친국하다] </ref>
 
1594년(선조 27년) 1월 김덕령은 의병을 이끌고 전남 담양에서 출발하여 해안가로 올라오는 왜군을 쳐부순 뒤 진주에 주둔하였다. 군율은 엄하였고 그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여러 도의 의병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의병을 관군에 흡수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의병들을 모두 김덕령 군에 소속시키었다. 그의 의병부대의 수는 증가했으나 [[명나라]] 군과 관군에게 전쟁의 주도권이 넘어갔고, 왜군들도 경남의 연안에 은거하면서 접전을 피하고 있었으므로 김덕령 의병군은 별다른 접전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49번째 줄:
 
[[1596년]]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다.<ref name='ss290201'>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902001_004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무술 4번째기사 잡아다가 국문하던 의병장 김덕령을 특명으로 석방시키다] </ref> 또한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는데,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윤근수의 앞에서는 수락하였다가 그가 떠나자 그 종의 아비를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ref name='ss290201' /> 게다가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ref name='ss290201' />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으나,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였음에도, 사헌부에서 처벌을 간하였으나 선조의 특명으로 풀려났으며,<ref name='ss290201' /><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1013_001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3일 경진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과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ref> 선조는 김덕령에게 전마(戰馬) 1필을 주었으며,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평하기를, “이제대장을 보니삼기에는 하나의가합하지 않고 돌격 장령(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할 뿐 대장을 삼기엔 가합하지합당한 않다.”라고자라고 하였다.
 
이후 담양에서 출발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하고 있던 중 그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의 원성이 조정에 전해지자 김덕령은 부하장졸에게 가혹한 군률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우의정]] [[정탁]](鄭琢)이 그의 공적을 칭송하며 석방을 탄원하는 등 정탁이 사면 요청하여 석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