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사 이태연 묘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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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정보
| 이름 = 이덕사 이태연 묘비<br />(李德泗 李泰淵 墓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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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 정보
| 이름 = 이덕사·이태연 묘비<br />(李德泗·李泰淵 墓碑)
| 국가 = {{국기그림|대한민국}} [[공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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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9
| 지정 = [[1997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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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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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연의 자(字)는 정숙(靜叔), 호는 눌재(訥齋)이다. 14세 때부터 서울에서 유학(遊學)을 하였으며, 신동(神童)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21세인 1635년(인조 13) 실시한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으나 다음해인 1636년 아버지 이덕사가 사망하여 홀로된 어머니를 모시고 학업에 정진하여 1642년(인조 20) 문과(文科) 정시(庭試)에서 을과(乙科) 1위(位)로 급제(及第)하여 관직을 시작하였다. 충청도와 전라도의 관찰사(觀察使),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승지(承旨)로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후 경상도의 관찰사가 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의 최고 관직인 정삼품(正三品) 대사간(大司諫)으로 임명되었다. 1668년(현종 9) 이조참의(吏曹參議)로 자리를 옮겨 있던 중 평안도의 관찰사가 공석이 되자 추천을 받아 종이품(從二品)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품계를 올려 받고 평안도관찰사 겸 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임명된다.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 이후 어려워진 평안도 지역의 군기(軍氣)를 다시 세우고, 민심을 돌보기 위해 관서지방(평안도)의 인재를 등용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고구려(高句麗)의 을지문덕(乙支文德)을 기리는 사당(祠堂)을 만드는 등 지역발전을 위해 많은 일들을 진행하던 중 사망한다.
이덕사의 무덤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묘비는 1666년(현종 7) 사위인 송시열이 작성하고 글씨를 쓴 것으로 크기는 높이 144cm, 폭 67cm, 두께 25cm이다. 묘비의 앞면에
이태연의 무덤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묘비는 1725년(영조 1)에 세워진 것으로 크기는 높이 163㎝, 너비 69㎝, 두께 29㎝이다. 묘비의 앞면에는
== 현지 안내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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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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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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