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알렉산데르 6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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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알렉산데르 6세'''(<small>[[라틴어]]:</small> Alexander PP. VI, <small>[[이탈리아어]]:</small> Papa Alessandro VI)는 제214대 [[교황]](재위: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이다. 본명은 '''로드리고 란조르 보르자 이 보르자'''(<small>[[스페인어]]:</small> Roderic Llançol-Borja i Borja)이다.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가운데 가장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교황 가운데 한 사람이다. 전통적으로 호색과 [[족벌주의]], 탐욕 등의 문제로 역사상 최악의 교황으로 손꼽히고 있지만, 이러한 세간의 악평은 대부분 생전에 그의 정적들이었던 이탈리아의 고위 성직자들과 영주들한테서 유래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세간의 악평과는 반대로, 알렉산데르 6세의 후임자들인 [[교황 식스토 5세]]와 [[교황 우르바노 8세]]는 그를알렉산데르 6세를 [[베드로|성 베드로]] 이래 뛰어난 지력을 갖춘 교황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하였다.<ref>Mallett, M. ''The Borgias'' (1969) Granada edition. 1981. p. 9.</ref> 그는알렉산데르 6세는 여타 다른 많은 르네상스 시대 교황들 못지않게 영적 지도자보다는 외교관이자 정치가, 행정관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갖춘 것으로 전해진다.<ref>Mallett passim.</ref>
 
== 출생과 가문 ==
로드리고 보르자는 [[1431년]] [[1월 1일]] 오늘날 스페인에 해당하는 [[아라곤 연합 왕국]] [[발렌시아]] 인근의 [[하티바]]에서 태어났다. 그의로드리고 보르자의 부친은 [[호프레 란조르 이 에스크리바]](1437년 3월 24일 사망)이며, 모친은 이사벨 데 보르자 이 카바닐루(1468년 10월 19일 사망)이다. [[1455년]] 로드리고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서 보르자 가문에 입적되었으며, 뒤이어 외가 쪽 숙부인 알폰소 데 보르자가 [[교황 갈리스토 3세]]로 선출되어 즉위하였다.<ref>Catherine B. Avery, 1972, ''The New Century Italian Renaissance Encyclopedia'', Appleton-Century-Crofts, {{ISBN|0-13-612051-2}}{{ISBN|978-0-13-612051-3}} p. 189. [http://books.google.com/books?id=3KYUAQAAIAAJ&q=%22Alonso+de+Borja,+Italianized+to+Alfonso+Borgia%22&dq=%22Alonso+de+Borja,+Italianized+to+Alfonso+Borgia%22&hl=en&sa=X&ei=eW45T52qG7CCsgK7rby6Bw&ved=0CDAQ6AEwAA]</ref><ref>http://www.nndb.com/people/159/000092880/</ref>
 
== 정부와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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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lexander VI guilia.jpg|알렉산데르 6세가 성모자 앞에서 무릎을 꿇은 모습을 담은 회화로, 성모 마리아의 모델은 줄리아 파르네세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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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여 여러 여인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다.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 (사람)|정부]] 가운데 가장 관계가 오래 지속된 여인은 [[1442년]]에 태어난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였다.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는 알렉산데르 6세를 만나기 전에 이미 세 번 혼인한 유부녀였다. 두 사람은 1470년에 처음으로 만나 애정 어린 관계가 되었으며, 슬하에 [[후안 보르자]](1474년 출생), [[체사레 보르자]](1476년 출생), [[루크레치아 보르자]](1480년 출생), [[호프레 보르자]](1481년 또는 1482년 출생) 등 총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은 알렉산데르 6세의 자녀로 공공연하게 인정받았다. 알렉산데르 6세의 또 다른 자녀로 알려진 지롤라마와 이사벨라, [[페드로 루이스 데 보르자]]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혈기를 주체하지 못하여 여러 여인과의 사이에서 많은 자녀를 두었다. 그의 [[정부 (사람)|정부1469년]] 가운데 가장 관계가 오래 지속된 여인은 1442년에 태어난 [[반노차 데이 카타네이]]였다. 그녀는 알렉산데르 6세를 만나기 전에 이미 세 번 혼인한 유부녀였다. 두 사람은 1470년에 처음으로 만나 애정 어린 관계가 되었으며, 슬하에 [[후안 보르자]](1474년 출생), [[체사레 보르자]](1476년 출생), [[루크레치아 보르자]](1480년 출생), [[호프레 보르자]](1481년 또는 1482년 출생) 등 총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은 알렉산데르 6세의 자녀로 공공연하게 인정받았다. 알렉산데르 6세의 또 다른 자녀로 알려진 지롤라마와 이사벨라, [[페드로 루이스 데 보르자]]의 경우에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1469년 알렉산데르 6세는 비토리아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베르나르도라는 아들을 두었다. 베르나르도는 알렉산데르 6세의 다른 자녀들과는 달리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시 추기경이었던 로드리고 보르자는 교황이 되기를 열망했었기 때문에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최대한 감추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베르나르도는 다른 형제 자매보다 아버지의 관심을 가장 적게 받았다. 결국 나이를 먹으면서 아버지에게 서운한 감정이 커져가던 그는베르나르도는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로드리고 보르자의 곁을 떠나버렸다. 어쨌든 알렉산데르 6세는 네 명의 자녀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많은 자녀를 두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처럼 단정치 못한 품행 문제 때문에 그는 [[교황 비오 2세]]에게 크게 질책을 받기도 하였다.
 
교황에 선출되기 전에 반노차에 대한 알렉산데르 6세의 열정은 다소 식었으며, 이후 반노차는 은퇴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데르 6세의 사랑은 [[줄리아 파르네세]]가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로도 알렉산데르 6세는 반노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여전히 간직하였는데, 이는 향후 그의 인생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교황으로 선출된 후에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아낌 없이 후원함으로써 온갖 특혜와 영예를 안겨주었으며, 그의 자녀들 모두 지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후원 덕분에 높은 직택에 앉거나 유력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한편 줄리아 파르네세는 알렉산데르 6세의 정부가 된 후부터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같이 생활하였으며, 1492년에는 알렉산데르 6세와의 사이에서 딸 라우라를 낳았다.
 
알렉산데르 6세는 [[포르투갈의 주앙 4세]]의 왕비 [[루이자 데 구스만]]의 조상으로서 사실상 남서부 지역에 있는 유럽 왕실들의 선조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