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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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역상자 러시아 혁명}}
{{전역상자 러시아 내전}}
'''10월 혁명''', 혹은 '''볼셰비키 혁명''' (十月革命, {{llang|ru|Великая Октябрь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cкая революция}})은 [[1917년]] 2월 혁명에 이은 [[러시아 혁명]]의 두 번째 단계이다. 10월 혁명은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도하에 [[볼셰비키]]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에 기반한 [[20세기]] 최초이자,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었다. 하지만, 공산주의 10월 혁명의 진짜 주체는 레닌 등의 [[공산주의]] 이론가들이 아닌, [[민중]]들이었다. 그래서, [[모스크바]]에 특파원으로 와 있던 [[일본]] 언론인은 민중혁명의 기운이 달아오른 모습에 대해 "노동자와 농민들이 근위병들의 탄압에도 혁명가를 부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레닌 자신도 "혁명이 이렇게 빠르게 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고 한다.<ref>《교실밖 세계사여행》, "러시아 10월 혁명의 그날", 김성환 지음, 사계절.</ref>
 
10월 혁명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 분열하여 형성된 좌파 세력인 [[볼세비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일련의 [[러시아 혁명]] 속에서 [[로마노프 왕조]]의 제정을 붕괴시키고 공화국을 탄생시킨 [[러시아 2월 혁명|2월 혁명]]에 이은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10월 혁명에서는 2월 혁명으로 출범한 [[입헌민주당 (러시아)|입헌민주당]](카데트) 주도의 임시정부가 쓰러지고 임시정부와 병존하고 있던 볼세비키 중심의 [[소비에트]](노동자, 농민, 인민위원회)로 권력이 집중되었다. 이것에 이어 [[러시아 내전]]( 1917 - 1922 )이 일어나, 결국 [[1922년]]에 사상 최초로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탄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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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농혁명위원회===
[[1917년]] [[10월 10일]]([[율리우스력]]), 볼세비키 중앙위원회는 투표를 실시하여 10대 2로 무장봉기는 더 이상 피할 수 없으며, 시기가 무르익었다."라는 선언을 채택했다.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는 [[10월 12일]](율리우스력)에 〈군사혁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것은 원래 페트로그라드의 방위를 목적으로 [[멘세비키]]가 제안한 것이었지만, 무장봉기를 위한 기관을 필요로 하고 있던 볼세비키는 찬성했다. 트로츠키는 "우리는 권력 탈취를 위한 사령부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고 연설하고 노골적으로 무장봉기의 방침을 인정했다. 그는 권력 장악을 승인하기 위해 [[10월 25일]](율리우스력) 개회 예정인 제2회 전국 소비에트 대회에 맞춰 봉기하자고 주장했다. [[멘세비키]]는 공농ɱ̍혁명위원회군사혁명위원회 참여를 거부했고, 위원회의 구성 멤버는 볼세비키 48명, 에스에르 좌파 (사회혁명당 좌파) 14명, 무정부주의자 4명이 되었다.
 
그 이후 군부의 각 부대가 차례로 페트로그라드의 소비에트에 대한지지를 표명했고, 임시정부가 아닌 소비에트의 지시에 따를 것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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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vrora1917Petrograd.jpg|섬네일|250px|순양함 아브로라(오로라), 1917년 촬영]]
[[파일:Stormningen av vinterpalatset.jpg|섬네일|250px|《겨울궁전의 돌입》, 1920년의 재현 군중극]]
[[10월 23일]] ([[그레고리력]] 11월 5일), 볼세비키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에스토니아 인의 [[얀 안벨트]](Jaan Anvelt)는 혁명 이후 설립된 [[에스토니아]] 자치 정부의 수도 [[탈린]]에서 극좌좌익 혁명 세력을 이끌고 무장 봉기를 시작했다. [[10월 24일]], 마지막 반격을 시도했던 임시정부는 부대를 동원하여 볼세비키의 신문 《라보치 프치》, 《소르다트》의 인쇄소를 점거했지만, 공농혁명위원회는군사혁명위원회는 이것을 계기로 무력 행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적위대는 별 저항없이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페트로그라드의 인쇄소, 우체국, 발전소, 은행 등 요충지를 제압했고, [[10월 25일]](양력 11월 7일)에 '임시 정부'는 타도되었다. 국가 권력은 페트로그라드 노농 소비에트 기관이며, 페트로그라드의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와 혁명군을 이끄는 공농혁명위원회로 옮겨졌다"고 선언했다.
 
임시정부의 각료가 남아 있는 [[겨울 궁전]]에 대한 점령은 25일 오후 9시 45분 방호 순양함 〈아브로라〉 공포사격을 신호로 블라디미르 안토노프 오후세엔코 이끄는 부대가 진입하기 시작했다. 겨울 궁전은 러시아군과 사관학교 생도, 여군이 방어를 맡고 있었지만, 거의 저항없이, 26일 새벽 오전 2시경에 점령되었다. 속수무책으로 회의를 계속했던 각료들은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마지막으로 겨울 궁전을 탈출하여 외국으로 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