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쿠마 시게노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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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에서 오쿠마는 국회 개설에 대비하여 1882년 입헌개진당(立憲改進党)을 창당하였다. 여기에는 [[고노 아즈사]], [[오자키 유키오]], [[이누카이 쓰요시]], [[야노 류케이]] 등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해 10월 현재 [[와세다 대학]]의 전신이 되는 도쿄전문학교를 도쿄 교외인 와세다에 창립하였다.
 
[[]]== 총리 취임과 정계 은퇴 ==
 
오쿠마의 외교 능력을 높이 평가하던 당시 총리 이토는 서구 열강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기 위해 [[1888년]] 2월 정적이었던 오쿠마를 외무대신으로 임명하였다. 이해 [[구로다 기요타카]]가 다시 총리에 취임하지만, 오쿠마는 외상에 유임되었다. 이후 오쿠마의 정책에 반대하는 극우단체 겐요샤(玄洋社)의 조직원이 던진 폭탄에 의해 오쿠마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이것 때문에 사임하였다.
 
[[1896년]] [[제2차 마쓰카타 내각]]에서 다시 외상에 임명되지만 사쓰마 파벌과의 대립으로 1897년 사임하였다. 1898년 6월 다시 [[헌정당]](憲政黨)을 창당하였고, 이어 메이지 유신 이후 정계를 지배하던 사쓰마파, 조슈파가 아닌 최초의 총리대신이 되었다. 또한 이는 일본 최초로 정당이 조직한 내각이었다. 그러나 당내의 파벌다툼이 격심하여 헌정당은 해산되고, 4개월만에 내각은 총사직하였다. 이후 다시 옛 헌정당에서 자신의 파벌이었던 진보당을 주체로 한 헌정본당(憲政本党)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후 1907년 정계를 은퇴하고 와세다 대학 총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서유럽의 문헌의 일본어 번역 사업, 남극탐험사업 등을 추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