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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과 의병 조직 ===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란 발생초에 의병을 일으키코자 하였으나 노모의 봉양6월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그는김덕령은 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을 찾아가,찾아가서 [[고경명]]의그의 막하에서 의병으로 활동하며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고향 광주로 귀향하였다. 다음 달인 7월 형 김덕홍이 금산(錦山)전투에서 호남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隆景]의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1593년]](선조 26년) 8월 형 김덕홍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하고 노모마저 세상을 떠나자떠났다. 상중임에도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 장성현감 [[이귀]](李貴) 등의등이 권유로천거하였고, 담양에서그에 의병을전라도 일으켜관찰사 병력이이정암(李廷馣)이 직접 찾아와서 국가의 위급함을 구제하도록 권면하니 그에 응하여 다시 의병을 담양에서 1천여일으키니 명에수백명이 이르렀다모였다.<ref name='s270105'>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1005_003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5일 갑신 3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무군사에서 김덕령에 종사하는 위대기 등에 대한 처리방법을 건의하다] </ref><ref name='12612013_009'>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2013_009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13일 임술 9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전라 감사 이정암이 김덕령의 재주가 뛰어나니 군사를 책임지울 것을 청하다] </ref> 12월 13일 이정암은 김덕령에게 각 고을에 저축한 군량과 병기를 내어줄 수 있도록 분조에 청하여<ref name='12612013_009' /> 허락을 받았다.
 
그해 12월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翼虎將)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ref name='s270105' /> 또한 김덕령이 권율의 막하에서 종군하며 권율에게 군호를 청하여 초승장(超乘將)을 받았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2029_003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29일 무인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에서 이덕형의 계사에 대한 대책을 아뢰다] </ref> 의병장 [[곽재우]]와는 막역한 사이로, 작전을 함께하기도 했다.
 
한편 장성현감 이귀(李貴), 담양부사 이경린(李景麟)의이경린의 추천으로 [[조선 선조|선조]]로부터 표창을 받아서, 이듬해 1월 5일 [[선전관]]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이때 아직 군공이 없다는 이유로 고관에 제수하지는 못하였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wna_12701005_001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5일 甲申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김덕령을 선전관에 제수하다] </ref>
 
[[1594년]](선조 27년) 1월 김덕령은 무군사에서 영남에서 싸워 지키라는 명을 받아<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01003_001 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3일 임오 1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김덕령이 국왕의 소명에 대해 즉시 전장으로 달려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상소하다] </ref> 의병을 이끌고 전남 담양에서 출발하여 진주에 주둔하였다. 군율은 엄하였고 그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다. 이때 조정에서는 여러 도의 의병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의병을 관군에 흡수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는데, 의병들을 모두 김덕령 군에 소속시키었다. 그의 의병부대의 수는 증가했으나 [[명나라|명군]]과 관군에게 전쟁의 주도권이 넘어갔고, 왜군들도 경남의 연안에 은거하면서 접전을 피하고 있었으므로 김덕령 의병군은 별다른 접전의 기회를 갖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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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는 병에 들어 전투에 나서지 못하였다.<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0015_007 선조실록 56권, 선조 27년 10월 15일 기미 7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병조 좌랑 김상준과 수군의 전황에 대하여 논의하다] </ref>
 
[[1595년]](선조 28년) 지난해 고성 전투에서전투의 일로 선조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군호를 받았으나,<ref name='s1261203'>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612030_005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30일 기묘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사에서 김덕령의 군대를 충용군이라 칭하고 기치를 내릴 것을 청하자 다시 의논하라고 하다] </ref> 아직 공을 세운 일로일이 선조로부터없다는 충용군이란이유로 군호를별다른 받았다기치나 표창은 받지 못했다.<ref name='s1261203' />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여러 차례 걸쳐 왜군을 싸웠으므로 위명이 높아갔다.
 
[[1596년]](선조 29년) 1월, 지난해 김덕령이 함부로 사람을 죽인 일로 국문을 당했다. 그는 지난해에 첩보(牒報) 전달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역졸 한 사람을 매로 쳐서 죽였다.<ref name='ss290201'> [http://sillok.history.go.kr/id/knb_12902001_004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2월 1일 무술 4번째기사 잡아다가 국문하던 의병장 김덕령을 특명으로 석방시키다] </ref> 또한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는데,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청탁하였니 김덕령은 윤근수의그의 앞에서는 수락하였다가 그가 떠나자 그 종의 아비를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ref name='ss290201' /> 게다가 사람을 물에 빠뜨려 죽였다고 거짓으로 말하는 자까지 있었다.<ref name='ss290201' /> 이로또한 말미암아담양에서 [[윤근수]]에게출발한 체포되어 김덕령이3년이 증거를지나도록 들어별다른 스스로전공을 해명하였음에도,올리지 사헌부에서못하고 처벌을있던 간하였다.<ref name='ss290201'그의 /><ref>엄격한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1013_001군율에 선조실록불만을 71권,품은 선조의병들의 29년원성이 1월조정에 13일 경진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과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ref>전해졌다.
 
결국 [[윤근수]]에게 체포되자 [[우의정]] [[정탁]](鄭琢) 등이 석방을 탄원하는 등 사면을 요청한다. 김덕령이 증거를 들어 스스로 해명하였음에도, 사헌부에서 처벌을 간하였다.<ref name='ss290201' /><ref>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01013_001 선조실록 71권, 선조 29년 1월 13일 경진 1번째기사, 사헌부에서 김덕령의 처벌과 그를 처벌하지 않은 형조 당상·색낭청의 추고를 청하다] </ref>
그러나 같은해 2월 선조는 김덕령을 특명으로 풀어주며 전마(戰馬) 1필을 주었으며,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평하기를, 대장을 삼기에는 가합하지 않고 돌격 장령(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한 자라고 하였다.<ref name='ss290201' />
 
그러나 같은해 2월 선조는 김덕령을 특명으로 풀어주며 전마(戰馬) 1필을 주었으며, 입시한 여러 신하들에게 일러 평하기를, 대장을 삼기에는 가합하지 않고 돌격 장령(突擊將領)을 시키기에 합당한 자라고 하였다.<ref name='ss290201' />
이후 담양에서 출발한 지 3년이 지나도록 별다른 전공을 올리지 못하고 있던 중 그의 엄격한 군율에 불만을 품은 의병들의 원성이 조정에 전해지자 김덕령은 부하장졸에게 가혹한 군률을 시행했다는 이유로 체포, 구금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우의정]] [[정탁]](鄭琢)이 석방을 탄원하는 등 정탁이 사면 요청하여 석방된다.
 
=== 이몽학의 난과 압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