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빈 박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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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
 
사망하기 전년도 늦가을에 갑자기 풍담(風痰) 증세가 생겼는데 얼마 후에 조금 차도가 있었다 그러나 병환이 차츰차츰 더 심해져 일어나지 못했다. [[1822년]](순조 22년) [[음력 12월 26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53세에 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2&moId=120&daId=260&gaLid=kwa_12212026_005&gaId=&yoId=&ilId=&leId=|제목=순조실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2&moId=120&daId=260&gaLid=kwa_12212026_005&gaId=&yoId=&ilId=&leId= }}</ref> 1822년(순조 22년) [[음력 12월 29일]], 빈청에서 원호는 원호는 휘경(徽慶) 시호는 현목(顯穆)으로 의논해 정하였다. 시호 현목의 뜻은 '행실이 중외에 드러남'을 현이라 하고 '덕을 베풀고 의로움을 간직함'을 목이라 한다.<ref>{{웹 인용|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2&moId=120&daId=290&gaLid=kwa_12212029_003&gaId=&yoId=&ilId=&leId=|제목=순조실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2&moId=120&daId=290&gaLid=kwa_12212029_003&gaId=&yoId=&ilId=&leId= }}</ref> 시호와 빈호가 더해져 '''현목유빈'''(顯穆綏嬪)이다. [[1823년]](순조 23년) 신위를 봉안한 사당을 현사궁(顯思宮)으로 불렀다가,<ref>{{웹 인용|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3&moId=020&daId=270&gaLid=kwa_12302027_003&gaId=&yoId=&ilId=&leId=|제목=순조실록|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JO&jwId=kwa_123&moId=020&daId=270&gaLid=kwa_12302027_003&gaId=&yoId=&ilId=&leId= }}</ref> [[1824년]](순조 24년) 사당을 옮겨 경우궁(景祐宮)이 되었고, 이후 신위는 궁정동 [[칠궁]]에 있다. [[1823년]](순조 23년) 1월 27일, 순조가 자궁께서 평소 사후의 일을 생각해 별도로 두신 은자를 호조에 내어주다라는 순조실록의 기록이 있다.{{인용문|하교하기를,
 
"자궁(慈宮)께서 평소 사후(死後)의 일을 생각하여 별도로 두신 은자(銀子) 1만 6천 냥이 있기에 지금 호조에 내어주니, 잘 헤아려서 원소(園所)의 역사와 후일 별묘(別廟)를 지을 때에 보태서 쓰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