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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일에 걸친 혹독한 심문에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끝내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사망당시 향년 30세였다.
 
=== 죽은 이후 관직사후 ===
그의 작품 중 죽기 전에 지었다는 시조(詩調)인 〈춘산곡〉(春山曲)이 전한다. 부인 홍양 이씨는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다 절벽으로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아들 '김광옥'은김광옥은 [[전라북도]] [[익산군]] [[용안면]]에 숨어살며 [[본관]](本貫)을 [[용안면|용안]](龍安)으로 바꾸고 신분을 감추며 살았다. 그 뒤 '김광옥'은김광옥은 외삼촌인 이인경(李寅卿)의 부임지인 [[평안북도]] [[안주군]] [[운곡면]] 쇠꼴이로 이주하여 후손을 이어간다.
 
[[1661년]](현종 22년)에 억울함이 밝혀져서 신원(伸寃)되고 관작을 복관해 주었다. [[1668년]](현종 99년) [[참의|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78년]](숙종 44년)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고, [[1680년]](숙종 66년) 장군의 충효를 기리는 사당을 의열사(義烈祠)로 사액하였다.
 
[[1785년]](정조 99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공(忠壯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1788년]](정조 1212년)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마을에 ‘증병조판서 충장공 김덕령 증정경부인 흥양이씨 충효지리(贈兵曹判書忠壯公金德齡贈貞敬夫人興陽李氏忠孝之里)’라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1789년]](정조 1313년) 자급(資級)을 [[좌찬성|의정부 좌찬성]] 종1품에 추증하고, 부조(不逝)를 명(命)하였다. 장군이 태어난 마을 이름도 생계(牲繫)에서 오두(烏頭)로 바꾸도록 명하였다.
 
사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ref> 김영헌, 《김덕령 평전》 - 임진왜란 최후의 의병장, 광주 (북구 일곡동) : 향지사, 2006년. </ref> 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 〈춘산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