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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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일에 걸친 혹독한 심문에 팔다리가 모두 부러진 채 끝내 옥중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사망당시 향년 30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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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작품 중 죽기 전에 지었다는 시조(詩調)인 〈춘산곡〉(春山曲)이 전한다. 부인 홍양 이씨는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일본군에게 쫓기다 절벽으로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아들
[[1661년]](현종
[[1785년]](정조
[[1789년]](정조
사후에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야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가 옮겨지게 되었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어,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가 흔치 않던 터라, 사진기를 무덤까지 가져와 보니 시신은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ref> 김영헌, 《김덕령 평전》 - 임진왜란 최후의 의병장, 광주 (북구 일곡동) : 향지사, 2006년. </ref> 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현재 광주 [[무등산]]에 있는 충장사에 전시되고 있다.
== 〈춘산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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