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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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이후로 준설이 없어 토사가 지속적으로 쌓여 오간수문이 막힐 지경에 이르자, 영조는 [[1760년]] 2월 개천을 준설하면서 하천바닥에서 파낸 흙을 한 곳에 모아 [[가산 (인공 산)|가산]]을 쌓게 한다. 오간수문 안쪽에 있었던 것으로, 하나는 개천 북쪽에, 하나는 개천 남쪽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도시의 근대화에 따라 사라졌고, 현재는 오간수교 위에 표지석이 있다. 이때의 준설 과정을 《[[준천사실]]》으로 기록하였다. 개천의 물 흐름에 관심이 있었던 영조는 [[1773년]] [[백운동천]]과 [[삼청동천]]이 합류하는 지점에서 오간수문 근처까지 석축을 쌓았다. 이를 통해 구불구불한 하천이던 개천을 영조가 호안공사를 통해 직선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 현대 ===
[[1950년대]] 중반의 [[청계천]]은 [[한국 전쟁]] 직후의 서울시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슬럼지역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추진된 것이 청계천 복개사업이었다.
 
청계천 복개사업은 [[일제 강점기]]나 [[1955년]]에도 일부 이루어졌지만, 청계천이 본격적으로 복개된 것은 [[1958년]]부터였다. [[1958년]] 5월부터 [[1961년]] 12월까지는 [[광교]] ~ 청계6가([[동대문 야구장]] 부근) 구간, [[1965년]]부터 [[1967년]]까지는 청계6가 ~ 청계8가(신설동) 구간, [[1970년]]부터 [[1977년]]까지는 청계 8가 ~ 신답철교 구간이 복개되었다. 그리고, 이 복개된 청계천 위에 [[청계고가도로]]가 건설되게 된다.
 
== 복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