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의 정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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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Flag of the Republic of China.svg|섬네일|중화민국(대만)의 국기]]
 
=== 대만 ( 1949년 - 현재 ) ===
1975년 중화민국의 독재자 [[장제스]]가 타계하자 2인자였던 [[옌자간]]이 권력을 승계하여 1975년부터 1978년까지 총통직을 맡았다. 허나 실질적인 권력은 수상이자 국민당 당수, 장제스의 아들이던 [[장징궈]]가 갖고 있었다. 장징궈가 1978년부터 1988년까지 총통으로 재직하는 동안 독재 정권이었던 중화민국도 점차 점진적인 민주정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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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민국 입법원 ===
[[중화민국 입법원]]의 모태인 국민 대회는 1928년, 장제스가 북벌을 마무리하고 난징에 [[중화민국의 역사|국민정부]]를 세운 후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후한민이[[후한민]]이 의장, 린썬이[[린썬]]이 부의장을 맡았으며 임기는 2년이고 정원은 49명이었다. 하지만 당시 중국 대륙에서는 군벌들이 세를 키우고 있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고, 제대로 된 선거를 치르지 못할 형편이었기에 의원 49명 모두가 정부에서 임명한 인사들이었다. 이들은 제대로 된 선거를 거쳐 당선된 의원들이 아니었고, 실제로 이후에도 중일전쟁 등의 이유로 선거를 치르지 못하며 임기가 14년에 이르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이들은 형법과 민법 등을 제정해 법치국가의 근간을 놓았으나, 실제로 민의를 대변하지는 못하였다.
 
중화민국은 1946년에 헌법을 처음으로 제정했고, 헌법 제정과 동시에 중화민국 입법원이 공식 출범했다. [[쑨원]]이 주장한 [[오권분립]] 사상의 일환으로 창설된 입법원은 국민대회의 하부기관으로 작동하며 입법권을 가졌다. 이 당시의 의원 정수는 중국 대륙 전역을 대표하여 총 759명이었다.
 
1948년, 초대 입법의원을 뽑은 이후, [[동원감란시기 임시조관|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으로 인하여 선거가 중단되었고, 1949년에는 패색이 만연해진 중화민국이 대만 섬으로 패주함에 따라 더이상 정상적인 선거를 치를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380여 명의 입법위원들이 장제스를 따라 대만 섬으로 옮겨갔다. 본디 초대 입법위원들의 임기는 1951년에 만기되었어야 했으나, 이미 독재자의 길을 걷고 있던 장제스는 이를 무시하고 '전국에서 선거를 치르는 것이 불가능하니 현임 의원들의 임기를 1년 연장한다'라는 내용의 조치를 취하였고, 이같은 조치가 7번 더 취해진 이후에는 1959년에 사법원에서 아예 정상적인 선거 불가능의 이유로 임기를 무제한으로 바꾸어버렸다. 중화민국에는 1969년부터 선거를 치르기는 하였으나, 국민당과 관제 야당이 아니라면 제대로 참여가 불가했고 1986년 총선 때부터 계엄령이 풀리기 시작하며 민주적인 선거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민주진보당이 입법원에서 의석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 1990년대 초반 입법회는 [[국민대회|국민 대회]]와 함께 [[양원제]]와 비슷한 기관이었으며, 국민 대회가 상원의 역할을, 입법회는 하원의 역할을 맡고 있었다.
 
2000년 4월,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국민대회의 의원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포기하고 더이상 국민대회 의원을 선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2005년에는 천수이볜 정부에서 탄핵권, 헌법 개정권 등을 비롯한 핵심권한들을 국민대회에서 입법원으로 옮겨가며 의회의 역할을 입법원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헌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의회 정원의 4분의 3 이상이 동의해야 하며 입법회를 통과한 이후에는 국민투표에서 적어도 유권자들 중 50% 이상의 동의를 얻어야만 가능하다.
 
=== 행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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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 ==
1997년 2월 23일 49년 [[국공 내전|국공내전]] 이후 처음으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 선박직항이 이뤄진 데이어 중화인민공화국이 4월 샤먼 해양해운 등 중국내 6개 해운회사에 중화민국과의 직접운항을 허가함에 따라 중화인민공화국 푸젠성 샤먼, 푸저우와 중화민국 남부 가오슝항을 연결하는 행운직항로가 공식개통. 지난 반세기 동안 금지해왔던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의 여객선직항을 1999년 5월부터 완화했다. 그리고 2000년 1월 양안간 무역 및 교류촉진방안의 일환으로 중국본토 여행금지법을 완화해 중간급 경찰관의 본토친지방문도 전력 허용했다. 그러나 중화민국 정부는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중국 대륙에 불법투자한 중화민국 기업을 제재할 방침이라고 밝히는 등 양안 관계가 큰 폭으로 진전되지는 않는 편이다. 98년 10월 샤호완창 행정원장은 기업인들의 본토투자 규제 완화 요구에도 불구, 규제방침을 고수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샹오 행정원장은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중화민국에 대한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방침을 포기하지 않는 한 중화민국 정부와 기업가들은 필요한 ‘경제방위선’을 유지할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리 총통은 96년 말 지나친 대륙경제의존도를 우려, 인내심을 갖고 천천히 해 나가는 방침을 촉구했다.경제부는 1997년 하이테크와 기간 산업, 5,000만달러 이상 규모 사업에 대한 중국대륙 투자를 금지했다. 타이완의 3만 5,000여 기업인은 현재 합법 또는 비합법적으로 300억달러 이상을 중국대륙에 투자해 온 것으로 추정된다. 1997년 7월1일 홍콩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반환돼 사상 초유의 일국양제의 실험에 들어간 가운데 리덩후이 총통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타이완 통일의 기본 방침으로 제시한 일국양제방안에 대해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일축하였다. 홍콩의 중화인민공화국 반환을 전후해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양측은 모두 대규모 군사훈련을 단행했다. 1999년 11월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과 지근거리에 있는 푸젠성 산유(仙遊)현에 M11∼Mod2 단거리 미사일 기지를 새로 건설하였다. 1998년 10월 상하이에서 중화민국-중화인민공화국 관계정립에 새 계기가 마련될 것이라는 기대 속에 양측간 최고위급 대화인 제 2차 ‘왕-구회동’이 개최되었다. 이것은 1993년 4월 싱가포르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왕다오한 해협양안관계협회 회장과 중화민국의 구전푸 해협류기금회 회장이 분단 40여년만에 최고위급회담을 개최한 지 5년만에 재개되었다. 중화민국은 두 사람의 만남을 ‘회담’이 아닌 ‘회동’또는 ‘접촉’ 등으로 의미를 축소하는 등 두 번째 왕-구 회동은 상호이견을 확인하는데 그쳤을 뿐 양안관계의 돌파구 역할에는 실패했다. 10월 28일 중국 에어 차이나소속 보잉 737여객기가 베이징을 이륙, 쿤밍으로 향하던 중 위앤빈기장에 의해 타이베이로 피랍돼 중정공항에 착륙했다. 샤오 행정원장은 여객기 납치는 국제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범죄행위라면서 납치법을 타이완 국내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