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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창'''(常平倉)은 [[고려]]고려시대와 [[고려 성종|성종조선시대]] 12년([[993년물가조절]]) [[개성]]과 [[평양]] 그리고 12목에 설치한 물가 조절을 위한 기관이다.
 
== 운용 ==
상평창은 이른바 흉년에는 백성들을 구하고, 풍년에는 농민들이 손해를 입지 않도록 한다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관에서 시가(市價)보다 비싸게 미곡을 사 두었다가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싸게 방출함으로써 곡가를 조정, 생활을 돕고자 한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관에서 시가(市價)보다 비싸게 미곡을 사 두었다가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싸게 방출함으로써 곡가를 조정, 생활을 돕고자 한 것이었다. 조선 시대로 오면 좀 더 구체적으로 곡가가 등귀할 때에 고가로 포(布)를 사들였다가 곡가가 저락(低落)할 때에 염가로 미곡으로 바꾸게 하였다.
 
== 고려의 상평창 ==
[[고려]] [[고려 성종|성종]] 12년([[993년]]) [[개성]]과 [[평양]] 그리고 12목에 설치한 물가 조절을 위한 기관이다.
 
고려 때 정부에서는 물가를 조절하고 안정시키기 위하여 포(布) 32만 필로 쌀 6만 4천 섬을 바꾸어 5천 섬은 경시서(京市署)에 저축하여 두었다가 적절한 시기에 매매케 하였다. 나머지는 [[고려 서경|서경]] 및 주군창(州郡倉) 15개소에 나누어 저장하였는데, 서경의 것은 분사(分司)의 사헌대에 맡기고, 주군창의 것은 각각 지방 장관으로 하여금 관리 매매케 했다.
 
== 조선의 상평창 ==
상평창은 이른바 흉년에는 백성들을 구하고, 풍년에는 농민들이 손해를 입지 않도록 한다는 정책에서 나온 것이다. 이것은 풍년에 곡가가 떨어지면 관에서 시가(市價)보다 비싸게 미곡을 사 두었다가 흉년에 곡가가 오르면 싸게 방출함으로써 곡가를 조정, 생활을 돕고자 한 것이었다.
[[조선]] 왕조에서도 이 제도는 존속되었고, 세조가 농사 시책에 용력(用力)하여 시행하였다. 상평창은 후에 이르러 물가의 조정뿐만 아니라 의창 대신 환곡제도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 왕조에서도 이 제도는 존속되었고, 조선이 기울어지게 된 원인의 하나였다.
 
== 함께 보기 ==
* [[의창]]
 
{{글로벌세계대백과}} <!-- 〈고려의 정치·경제·사회구조〉, 〈경제체제의 해이〉 -->
[[분류:고려고려의 행정기관]]
[[분류:조선조선의 행정기관]]
[[분류:법률]]
[[분류:경제]]
[[분류:사회 보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