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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습'''(柳濕, [[1367년]] [[음력 10월 27일|10월 27일]]<ref>『춘당공정미갑계첩 春塘公丁未甲稧帖』</ref> ~ [[1439년]] [[음력 8월 6일|8월 6일]])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본관은 [[고흥 류씨|고흥]](高興). 아버지는 고려 시중(侍中) [[류탁]](柳濯)이다의 차남이다.
 
== 생애 ==
음직(蔭職)으로 벼슬에 임명되어 합문 인진사(閤門引進使)가 되었다.
 
[[조선 태조]](太祖)가 꿈에 류탁을[[류탁]](柳濯)을 보았는데, 그 아들을 벼슬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깨어 나서 이상하게 여기어 류탁은 고흥백(高興伯)이 되었고, 류습은 과의 상장군(果毅上將軍)에 특진되었다.
 
[[조선 태종|태종]](太宗)을 섬겨 원종공신이 되고, 예조·형조·병조·이조의 전서(典書)를 역임한 뒤, 전라(全羅)·충청(忠淸)·평안(平安) 3도의 도절제사가 되고,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에 승진하였다. 이어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경기우도도총제·호분시위사총제·개천도감제조(開川都監提調)·별사금제조(別司禁提調) 등을 역임하고, 1414년에는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18년 평안도도절제사를 역임하고, [[1419년]](세종 1)에는 우군 원수(右軍元帥)가 되어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하였다. 돌아와서 병으로 물러가기를 빌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나이 73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매 조회(朝會)를 정지하고,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다. 시호(諡號)를 양정(襄靖)이라 하였으니, 갑주(甲胄)에 유능(有能)함을 양(襄)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겁게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아들은 류지(漬)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8006_004 세종실록 86권, 세종 21년 8월 6일 임오 4번째기사]</ref>
 
돌아와서 병으로 걸퇴(乞退)했으며, [[1439년]](세종 21) 졸했다. 향년 73세. 시호(諡號)는 양정(襄靖)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da_12108006_004 세종실록 86권, 세종 21년 8월 6일 임오 4번째기사]</ref>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