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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때에 정권을 잡았던 안동 김씨 세력은 헌종이 즉위하면서 풍양 조씨 집안에게 잠시 권력을 내주었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정권을 잡아 세도를 떨쳤다. 60년간 이어진 세도정치의 영향으로 왕권은 한없이 나약해져서 백성은 물론 왕족들마저도 안동 김씨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기형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는 온갖 부정부패를 야기했는데 전정(田政) · 군정(軍政) · 환곡(還穀) 등 이른바 [[삼정의 문란|삼정(三政)의 문란]]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조선 후기의 농민 구성을 보면 8할 이상이 소작농인데, 병작반수제,지주의 전정을 소작농에게 부담시키는 행위, 변질되어버린 잡세, 환곡, 군정 등으로 그 부담이 매우 컸다. 배향섭 교수의 저서 임술 민란과 19세기 동아시아 민중 운동에서는 '''조선 후기 농민들이 일년 농사를 지어 수확한 곡물로는 소작료와 환곡을 감당하기도 힘들었으며 기타 각종 잡세의 부담은 직포를 짜서 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직포업은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으나 가장 기본적인 생산물인 곡물은 지주와 국가에 수취 되어 농민들은 생존을 위해 가내 수공업에 의지하였는데 이마저도 군역으로 수취 되었던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정약용 또한 생활고에 못 이겨 소작농들이 자신의 처자를 노비로 매매하는 행위와 군역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 거세를 하는 행위를 보고 개탄 하기도 하였다. 한길사 한국사에서는 조선 후기 일반적인 지대와 세금은 수확량의 70~80% 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외척들의 세도정치로 인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자 이에 대항하는 민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이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조 때의 [[홍경래의 난]](1812년), 철종 때의 [[진주민란]](1862년) 등이다.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도 하에 수많은 몰락한 농민들과 영세농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한때 [[청천강]]에서 [[의주]]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장악했으나 4개월 만에 관군에 의해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 이후에도 민란은 계속 이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그럼에도 세도 정권의 탐학과 횡포는 날로 심해져 갔고 재난과 질병이 거듭되었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이런 현상이 더욱 심해져 백성의 생활은 그만큼 더 어려워져 갔다. [[1820년]]의 전국적인 수해와 이듬해 [[콜레라]](조선에서는 괴질이라고 불림)의 만연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비참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 피해는 그 뒤 수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이에 따라 굶주려 떠도는 백성이 거리를 메울 정도였다. 이와 전후하여 천주교가 전래하였으나 박해를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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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명성황후 살해 사건 [[을미사변]]은 미국인과 러시아인에게 목격되어 국제적인 문제가 되었다. 국제 사회의 비난 여론을 받자 일본 외무성은 명성황후 살해의 주동자인 미우라 공사 등을 소환하여 재판과 군법회의에 회부하였지만 일본 나가사키 고등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판시하며 전원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반일 감정이 극도로 고조되어 을미의병이 일어났으며, 위정척사를 주장하는 선비들의 주도 아래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여 친일파와 일본 민간인들을 공격하고 일본군 수비대와 각지에서 교전하였다. [[을미의병]]은 유인석, 김복한, 기우만, 이강년 등이 주도하였다. 일본군이 의병 토벌로 한양을 비우게 되자 고종은 1896년 2월 11일에 경복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는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고종은 [[1897년]]에 [[덕수궁]]으로 환궁하고 수 달 후 [[대한제국]]을 선포함으로써 국호로서의 조선은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참고|대한제국|설명=1897년 이후 조선에 대해서는}}
 
== 정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