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진의 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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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는 처음엔 자신들과 같은 북방의 이민족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수도 [[평성]]의 가까운 거리에 생명선을 긋고 북쪽의 수비를 중요시하며 요새를 쌓았다. 처음엔 선비족이나 흉노족의 유력 호족을 선택해 6진을 대표하는 북쪽을 경비하는 영민으로 이주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당연히 영민들은 대가로 특권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북위 효문제|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의해 수도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하자 이때부터 북쪽의 영민은 서서히 냉대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본래 명족출신이었던 그들을 ['''부호'''](府戶)라는 출세를 더이상 바라볼 수 없게 차단되는 호에 편제하고, 중앙으로부터 서임된 장관인 도대장(都大將)에게 착취당하는 몸이 되자 일거에 불평불만이 증대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축적된 불만이 폭발한 것은 [[523년]] 옥야진 백성의 거병이었다. [[파륙한발릉]](破六韓抜陵)이 수령(首領)인 반란병들은 수비대장을 살해하였고, 이들의 움직임에 홀려 기타 여러 진들에도 전염되었다. 결과적으로 이 반란자체는 [[530년]] 장군 [[이주영 (북위)|이주영]]이 진압했으나, 그 후 북위에 대한 [[양 (남조)]]나라 군대의 침공이 있었고, 또한 국내는 정권을 장악한 [[이주씨]] 일파의 전횡이 일어나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여 멸망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