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인리히 힘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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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생애 ==
[[파일:Himmler7.jpg|섬네일|왼쪽|200px|[[1907년]]의 하인리히 힘러]]
[[독일]] [[바이에른주]] [[뮌헨]]에서 학교 교장인 아버지 게프하르트 힘러와 평범한 가정주부인 어머니 안나 힘러 사이에서사이 3남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형제자매로는 형 [[게프하르트 루트비히 힘러]], 남동생 [[에른스트 헤르만 힘러]]가 있었다.
 
힘러는 [[1918년]] [[란트슈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힘러는졸업하고서 [[사관 후보생]]으로 임명받아 11 [[바이에른 보병연대]]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장교로 임관되기임관하기 전에 전쟁이 끝나버려끝난 탓에 힘러는 전투를전투 겪어보지도경험 못하고없이 제대했다.
 
힘러는 다음 해인 [[1919년]], 힘러는 뮌헨 기술학교에서 [[농경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여 [[농업학]] [[학위]]를 받았다. 힘러는 학생 시절, 힘러는 [[자유군단]]에서 활동했다. 자유군단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독일 패배에 분개하는분개한 구독일군 출신들로출신이 구성된구성한 우익계 사병 집단이었다. 힘러는 1920년, 힘러는 동거하던 [[매춘부]] 프리다 바그너의바그너를 살해살해한 혐의로 경찰의 수배를 받았다. 이웃 주민들은 두 사람이 자주 싸웠다고 했고, 힘러가 갑자기 종적을 감춤과 동시에 바그너가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발견되었다. 경찰은 힘러를 범인으로 지목했고, 7월 4일 뮌헨에서 체포했다. 그러나 9월에 열린 재판에서 힘러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다. 이 시기 힘러의힘러 행적은 분명하지 않은 게 많다. 그는 나중에 권력자가 되면서권력자되고서 초기 기록들을기록을 대부분 말살했기 때문이다말살했다<ref>게슈타포, 광기의 역사, 작크 드라류 저, 서석연 역 (도서출판 가야, 서울, 1987년), 109쪽</ref>.
 
1921년 초 고향에 돌아온 힘러에게 부모는 양계장을 차려주면서 정치 활동에서 손을 뗼 것을 권했다. 그러나 힘러는 양계업을 하면서 동시에 "피와 대지와 검"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독일 농민 계급의 혁신"을 주장하던 과격파에 가담하고 있었다. 이 구호는 나중에 SS의 기본 원리가 되었다. 비록 사업은 실패했지만, 이때 닭을 키우던 경험은 나중에 SS의 인종 이론에 영향을 미쳤다<ref>같은 책, 111쪽.</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