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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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 국은 역사적으로 그 북부가 게노 국(毛野国)과 관계가 깊었고, 당초에는 같은 도산도(東山道)에 속해 있었다. 도산도는 수도 교토가 위치한 기나이(畿内)에서 게노 국을 지나 [[무쓰 국|미치노쿠]](陸奥)로 가는 지름길이었다. 그러나 고쿠후가 위치한 후추는 그 지름길로부터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닛타(新田) ・ 아시카가(足利)에서 뻗어나와 무사시 국을 거의 가로지르는 지선인 도산도 무사시노미치(東山道武蔵路)가 설치되었다. 그 뒤 무사시 국은 그 남부에 있어사가미 및 도쿄만(東京湾)을 경유해서 오가는 것이 차츰 활발해져서 [[호키]](宝亀) 2년([[771년]]) 10월 27일에 도카이도로 이관되어 사가미 ・ 무사시 ・ [[가즈사 국|가즈사]](下総)를 잇는 육로도 정비되었다. [[진고케이운]](神護景雲) 2년에 일본 조정은 전국에서 행실이 선하다는 평을 받은 자들을 선발해 종신토록 세금을 면제해 주도록 하였는데, 마찬가지로 호키 3년에 이루마 군(入間郡) 사람으로 야타노베노 구로마로(矢田部黒麻呂)가 효양(孝養)을 이유로 종신토록 전조(田租)를 면제받는다는 혜택을 입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인 [[엔초]](延長) 5년([[927년]]) 완성된 《엔기시키》(延喜式)에 따르면 관에서 운영하는 칙지목쵸쿠시마키(勅旨牧) 즉 국영 목장 네 곳이 무사시에 설치되었다. 일본 조정에서는 해마다 50두의 말을 가려 바치게 하였고, 그 뒤로도 칙지목은쵸쿠시마키는 더욱 늘어나서, 이를 관리하기 위해 중앙으로부터 군사귀족이 파견되고 재청관인(在庁官人)이 실무를 맡았다. 그러나 딱히 평온하다고 할 수만은 없었고, [[덴교]](天慶) 2년([[939년]]) 무사시의 스케(介)로 부임한 [[미나모토노 쓰네모토]](源経基)와 아다치 군수 무사시노 다케시바(武蔵武芝)와의 분쟁은 조헤이 덴교의 난(承平天慶の乱)이라 불리는 [[다이라노 마사카도]]의 봉기의 원인이 되었다.
 
=== 중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