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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활동 ==
[[1791년]] [[10월 1일]] 성립된 입법부에서는 우파 세력 의원 264명으로 구성되어, 공화정을 주장하는 좌파좌익 세력의 [[자코뱅파]]([[지롱드파]] 포함) 136명과 충돌했다. 푀양파가 중심이 되어 입헌 의회에서 제정한 [[입헌군주제]]를 정권으로 하는 《[[1791년 프랑스 헌법]]》의 유지를 주장하며 혁명의 진정을 노력했지만, [[샹 드 마르스 학살]]의 후유증으로 지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필니츠 선언]]》과 망명 귀족의 계획은 대외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하면, [[지롱드파]]와 함께, 그러나 지롱드파와 다른 이유로 주전론을 전개했다. 푀양파는 입헌왕정의 확립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초기에 승리를 거두고 정권을 확고히 한 후 국경에서 군대를 불러와 파리의 공화주의자들을 탄압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라파예트]]와 [[니콜라 뤼크네르|뤼크네르]] 원수가 지휘하는 프랑스군에서 귀족인 장교들이 대량으로 망명하여 전력이 약화되었고, 그 결과 연전연패하면서 궁지에 몰렸다. 라파예트와 이후에 [[뒤무리에]]가 파리 진격을 계획하고 왕실의 보호라는 임무를 다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대중이 푀양파를 반혁명의 왕당파로 간주하면서 완전히 혁명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다.
 
의회에서 푀양파는 [[1791년]] [[12월 9일]]부터 책임 내각을 운영했지만, [[1792년]] [[3월 10일]] 오스트리아와 전쟁에 반대를 했던 푀양파의 외무대신이 지롱드당에 의해 파면되었다. [[루이 16세]]는 이후 지롱드파 내각을 임명했지만, 이것도 [[6월 13일]]에 파면되고 다시 푀양파 내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정권 운영 불능으로 [[7월 10일]] 다시 총사퇴를 했다. 다음날, 의회는 “조국이 위기에 빠졌습니다”라는빠졌습니다.”라는 선언을 하게 된다.
 
《[[8월 10일 사건]]》을 통해 왕정 폐지와 공화국의 선언이 이루어지면서, 그 이후에는 쇠퇴를 거급하여 푀양파 의원의 거의 대부분은 체포되어 몇몇은 [[단두대]]에 섰으며, 나머지는 망명을 할 수 밖에 없었다.
 
[[1795년]], [[총재 정부]]가 들어서고 반동의 결과로서 우파 세력이 부활하자 망명한 푀양파의 의원도 귀국하여 복귀를 하였다. 그러나 푀양 클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그들을 더 이상 푀양파라고 부르지 않고 보통 “입헌군주파”라고 부르게 되었다. 푀양파의 의원은 제정기나 복고 왕정에서 활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