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 기미야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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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기미야스'''({{llang|ja|工藤 公康}}, [[1963년]] [[5월 5일]] ~ )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이자 야구 지도자, 야구 해설가·평론가이다. [[아이치현]] [[도요아케시]] 출신이며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였다.
 
현역 시절 14차례의 리그 우승, 11차례의 [[일본 선수권 시리즈|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ref name="daily">[http://dailynewsonline.jp/article/1029383/ {{lang|ja|【日本シリーズ】自らサヨナラ安打…「優勝請負人」工藤公康の"名場面" (1/2ページ)}}] {{웨이백|url=http://dailynewsonline.jp/article/1029383/ |date=20160310033051 }} - 데일리 뉴스 온라인, 2015년 10월 24일</ref>했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다이에]], [[요미우리 자이언츠|요미우리]] 등 3개 구단에서 일명 ‘우승 청부사’({{lang|ja|優勝請負人}})라고 불린다.<ref name="daily"/><ref name="sponichi">{{웹 인용|url=http://www.sponichi.co.jp/baseball/special/calender/calender_09may/KFullNormal20090501168.html|title=【5月23日】2007年(平19) 工藤公康、セ最年長記録「一番長くて忘れられない1勝」|publisher=Sponichi Annex|accessdate=2017-01-27|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60711082918/http://www.sponichi.co.jp/baseball/special/calender/calender_09may/KFullNormal20090501168.html|archivedate=2016-07-11|url-status=dead}}</ref> 또한 일본 시리즈 통산 최다 탈삼진 기록을 보유했다.<ref>[http://dailynewsonline.jp/article/1029383/ {{lang|ja|【日本シリーズ】自らサヨナラ安打…「優勝請負人」工藤公康の"名場面" (2/2ページ)}}] {{웨이백|url=http://dailynewsonline.jp/article/1029383/ |date=20160310033051 }} - 데일리 뉴스 온라인, 2015년 10월 24일</ref>
 
2012년부터 2014년까지 3년간 야구 해설자와 평론가로서 활동했고 2015년부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감독을 맡고 있다.<ref name="Nikkan">[http://www.nikkansports.com/baseball/news/f-bb-tp0-20141101-1390453.html {{lang|ja|工藤新監督「恩返ししたい」 背番は81}}] - 닛칸 스포츠, 2014년 11월 1일</ref><ref name="Hawks">[http://www.softbankhawks.co.jp/news/detail/11471.html {{lang|ja|工藤公康氏の福岡ソフトバンクホークス監督就任について}}] {{웨이백|url=http://www.softbankhawks.co.jp/news/detail/11471.html |date=20141101075806 }}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홈페이지, 2014년 11월 1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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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단 1년차인 1982년부터 감독인 히로오카 다쓰로에게서 ‘꼬맹이’라고 불릴 정도의 귀여움을 받으며 중간 계투로 기용됐다.<ref>관련 출처 :
* [http://www.sponichi.co.jp/baseball/special/calender/calender_09november/KFullNormal20091101249.html {{lang|ja|【11月12日】1982年(昭57) 工藤公康“プロ初先発”はメロメロ 追試もボロボロ}}] - 스포츠 닛폰
* {{web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50924165143/http://www.sponichi.co.jp/baseball/special/calender/calender_09november/KFullNormal20091101249.html |date=2015년 9월 24일}}</ref> 그 해에는 27경기에 등판하여 1승 1패, 평균 자책점 3.41의 좋은 성적을 남겼는데 히로오카에게서는 엄격한 지도를 받으면서 큰 영향을 받았다.<ref>관련 출처 :
관련 출처 :
* 《라이온스 60년사 : 사자의 기억 - ‘니시테쓰’에서 ‘사이타마 세이부’까지》, [[베이스볼 매거진사]], 2010년, p.74 ~ 77
* 《[[슈칸 겐다이]]》, [[고단샤]], 2009년 11월 14일, p.136
* [[규슈 스포츠]], 2009년 10월 28일, 3면
* [http://www.nikkei.com/article/DGXBZO56738120Y3A620C1I10000/ {{lang|ja|人の自立を促すのが真のリーダー 野球評論家 工藤公康}}] {{웨이백|url=http://www.nikkei.com/article/DGXBZO56738120Y3A620C1I10000/ |date=20151223043140 }} - 니혼케이자이 신문, 2013년 7월 2일
* [http://www.zakzak.co.jp/sports/baseball/news/20150127/bbl1501271550002-n1.htm?view=pc {{lang|ja|工藤新監督、鷹常勝軍団へ“広岡イズム”で指導 厳しい指導も“プロとは何か”教わる}}] {{웨이백|url=http://www.zakzak.co.jp/sports/baseball/news/20150127/bbl1501271550002-n1.htm?view=pc |date=20150925095109 }} - ZAKZAK, 2015년 1월 27일
* [http://www.sanspo.com/baseball/news/20150801/haw15080113000002-n1.html {{lang|ja|【球界ここだけの話(254)】ソフトバンク・工藤監督が半袖を着られないワケ}}] {{웨이백|url=http://www.sanspo.com/baseball/news/20150801/haw15080113000002-n1.html |date=20160128224117 }} - 산케이 스포츠, 2015년 8월 1일
* [http://business.nikkeibp.co.jp/article/opinion/20141028/273115/ {{lang|ja|黄金期西武は監督11人を輩出}}] {{웨이백|url=http://business.nikkeibp.co.jp/article/opinion/20141028/273115/ |date=20151220203006 }} - 닛케이 비즈니스 온라인, 2014년 10월 31일</ref><ref name="asagei42872">[http://www.asagei.com/excerpt/42872 {{lang|ja|ソフトバンク・工藤公康 V当確の裏にあった“広岡式管理野球”!「ヘッドコーチを置かなかった理由」}}] {{웨이백|url=http://www.asagei.com/excerpt/42872 |date=20160304192541 }} - 아사게이 플러스, 2015년 9월 13일</ref> 같은 해 퍼시픽 리그 [[1982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에 등판하여 2차전에서는 [[에나쓰 유타카]]와의 투수전 끝에 승리 투수가 됐다. 참고로 퍼시픽 리그 전·후기제 시절의 플레이오프는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1983년에는 중간 계투의 주축으로서 기용됐지만 2경기에 선발로 등판했고 평균 자책점도 3점 대를 기록하여 이 해에도 호투하는 활약을 보였다. 입단 3년차인 1984년에는 9경기 등판에만 그쳤고 히로오카의 명을 받아 미국의 싱글A 팀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의 야구를 관전했던 것이 전환기가 됐고 이후엔 귀국하여 [[미야타 유키노리]]의 지도를 받고 팀의 주력 투수로 성장했다.<ref>관련 출처 :
* [http://business.nikkeibp.co.jp/article/opinion/20141028/273115/ {{lang|ja|黄金期西武は監督11人を輩出}}] {{웨이백|url=http://business.nikkeibp.co.jp/article/opinion/20141028/273115/ |date=20151220203006 }} - 닛케이 비즈니스 온라인, 2014년 10월 31일
* [http://tenshoku.mynavi.jp/job/heroes_file/001_1.cfm {{lang|ja|<朝日新聞×マイナビ転職>Heroes File〜挑戦者たち〜 工藤公康さんvol.1}}] {{웨이백|url=http://tenshoku.mynavi.jp/job/heroes_file/001_1.cfm |date=20140528010628 }}
</ref><ref name="asagei42872">[http://www.asagei.com/excerpt/42872 {{lang|ja|ソフトバンク・工藤公康 V当確の裏にあった“広岡式管理野球”!「ヘッドコーチを置かなかった理由」}}] - 아사게이 플러스, 2015년 9월 13일</ref> 같은 해 퍼시픽 리그 [[1982년 퍼시픽 리그 플레이오프|플레이오프]]에 등판하여 2차전에서는 [[에나쓰 유타카]]와의 투수전 끝에 승리 투수가 됐다. 참고로 퍼시픽 리그 전·후기제 시절의 플레이오프는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1983년에는 중간 계투의 주축으로서 기용됐지만 2경기에 선발로 등판했고 평균 자책점도 3점 대를 기록하여 이 해에도 호투하는 활약을 보였다. 입단 3년차인 1984년에는 9경기 등판에만 그쳤고 히로오카의 명을 받아 미국의 싱글A 팀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의 야구를 관전했던 것이 전환기가 됐고 이후엔 귀국하여 [[미야타 유키노리]]의 지도를 받고 팀의 주력 투수로 성장했다.<ref>관련 출처 :
* [http://www.biwa.ne.jp/~horii-01/times/kiji3/index.html {{lang|ja|▼私を育てた「限りなき挑戦」「目標を持ち、立ち向かう精神を」 元プロ野球選手・工藤公康氏 約30年の野球人生を語る 守山商工会議所主催}}] {{웨이백|url=http://www.biwa.ne.jp/~horii-01/times/kiji3/index.html |date=20150923191156 }} - 모리야마 타임스, 헤이세이 24년(2012년) 3월호</ref>
* [http://tenshoku.mynavi.jp/job/heroes_file/001_1.cfm {{lang|ja|<朝日新聞×マイナビ転職>Heroes File〜挑戦者たち〜 工藤公康さんvol.1}}]
* [http://www.biwa.ne.jp/~horii-01/times/kiji3/index.html {{lang|ja|▼私を育てた「限りなき挑戦」「目標を持ち、立ち向かう精神を」 元プロ野球選手・工藤公康氏 約30年の野球人生を語る 守山商工会議所主催}}] - 모리야마 타임스, 헤이세이 24년(2012년) 3월호</ref>
 
1985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선발로 전향했는데 이 해에는 8승 3패를 기록했는데도 자신의 첫 타이틀이 되는 [[일본 프로 야구 최우수 평균 자책점|최우수 평균 자책점]]을 획득했다. 이듬해 1986년에는 프로 입문 후 처음이자 두 자릿수 승리가 되는 11승을 올렸고 완투 수도 10회를 기록했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 맞대결을 펼친 [[1986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세이부가 1차전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후 내리 3연패를 당했는데 5차전에서는 연장 12회, 투수인 구도가 타석에 들어서며 끝내기 [[안타]]를 기록했다. 그 후 세이부는 3연패를 당한 뒤 4연승을 기록하여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1승 2세이브를 기록한 자신도 일본 시리즈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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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는 부상으로 인한 전력 이탈이 있어서 시즌 성적은 7승에 그쳤지만 팀은 다이에가 구단을 인수한 이후 처음이 되는 A클래스(1위 ~ 3위) 진입에 성공하여 [[오릭스 버펄로스|오릭스 블루웨이브]]와 공동으로 3위를 차지했다(당시 다이에와 오릭스의 시즌 승률은 5할). 구도 자신도 세이부 시절이던 1994년 이후 4년 만에 A클래스를 경험했다.
 
이듬해 1999년에는 구도가 에이스로서 11승을 올리는 등 통산 네 번째가 되는 최우수 평균 자책점과 통산 두 번째인 최다 탈삼진 타이틀을 연거푸 획득했다. 다이에가 [[후쿠오카시|후쿠오카]]로 연고지를 이전한 이후 첫 리그 제패에 큰 공헌을 하여 시즌 MVP에 선정됐다. 주니치와 맞붙은 [[1999년 일본 시리즈|일본 시리즈]]에서는 1차전에 선발 등판해 일본 시리즈 신기록이 되는 13개의 삼진을 빼앗아 완봉승을 거둔 이 경기에서 자신의 일본 시리즈 통산 탈삼진수를 86으로 늘렸고, [[이나오 가즈히사]]가 갖고 있던 기록(84개)을 넘어섰다.<ref>{{웹 인용|url=https://www.nishinippon.co.jp/hawks/article/369088/|title=コメントで読む99年ダイエー日本一 痛めた脚でスーパージャンプの秋山は…|publisher=니시닛폰 스포츠|date=2017-10-27|accessdate=2017-10-2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71030041117/https://www.nishinippon.co.jp/hawks/article/369088/|보존날짜=2017-10-30|깨진링크=예}}</ref> 주니치의 [[호시노 센이치]] 감독은 “적을 칭찬하는 것은 싫지만, 구도는 우리 팀을 0점으로 막아냈기 때문에 굉장한 투수다”라고 분한 감정을 드러내며 말했다. 구도 자신은 훗날 자신의 저서에서 이 경기의 투구를 “생애 최고의 경기였다”라고 평가하며 삼진을 빼앗은 것과 땅볼을 치게 하는 것도 자신이 생각했던 대로였다고 밝혔다. ‘주니치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라는 하마평 속에서 구도의 완봉승으로 기세를 탄 다이에는 4승 1패의 성적으로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고 구도 자신도 일본 시리즈 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시즌 종료 후 FA를 선언해 한때는 주니치 드래곤스나 메이저 리그 이적에 얽메였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지만<ref>[https://web.archive.org/web/20010218044222/http://www.mainichi.co.jp/suponichi/archive/199911/1125-sportsnews1.html {{lang|ja|工藤 巨人消した?}}] - 마이니치 인터랙티브(마이니치 신문), 2001년 2월 18일</ref> 최종적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이적이 결정됐는데 4년 계약을 포기하고 단년 계약을 맺었다.<ref>[https://web.archive.org/web/20010217170156/http://www.mainichi.co.jp/suponichi/archive/199912/1215-sportsnews1.html {{lang|ja|工藤 引退覚悟契約}}] - 마이니치 인터랙티브(마이니치 신문), 2001년 2월 17일</ref> FA에 대해서는 “(다이에에서)좀더 있고 싶었다”라고도 말했다.
 
2008년에 [[슈칸 베이스볼]]과의 인터뷰에서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부터 오퍼가 있었던 사실을 밝혔다. 결과적으로 일본을 택한 것은 같이 상담했던 [[노모 히데오]]에게서 조언을 받은 것 때문이라고 한다.<ref>[http://gendai.ismedia.jp/articles/-/46911?page=3 {{lang|ja|マエケンに問われる「覚悟」〜男たちはなぜメジャーを目指すのか}}#{{lang|ja|野茂英雄の言葉}}] {{웨이백|url=http://gendai.ismedia.jp/articles/-/46911?page=3 |date=20171202102826 }} - gendai</ref>
 
이적을 앞두고 후쿠오카에서는 구도의 잔류를 바라는 팬들이 서명 활동을 주도했고 17만 3,000명이 넘는 서명이 모였다. 구도는 이적 후, 서명에 참가한 팬 전원에게 주소와 이름을 친필로 적어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이 감사의 편지를 보내는 데는 약 7년이 걸렸다고 한다.<ref>[http://www.sponichi.co.jp/baseball/news/2015/07/02/kiji/K20150702010651601.html {{lang|ja|SB工藤監督が初告白 ダイエー残留署名17万人に感謝の手紙}}] - 스포츠 닛폰, 2015년 7월 2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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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구단에서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경험했기에 이를 계기로 ‘우승 청부사’라고 불렸다.<ref name="daily"/><ref name="sponichi"/>
 
현역 시절에 영양가가 높은 식사를 하거나 녹즙을 마시는 등 컨디션 관리에 신경을 쓰는 것으로 유명하지만<ref name="asagei42872"/> 그렇게 하게된 이유는 부인 마사코와 결혼한 이후에 시작한 것이다. 그 이전에는 매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숙취에 절어 등판하는 등 불규칙한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ref>[http://style.nikkei.com/article/DGXBZO55632600Q3A530C1000000 {{lang|ja|「あいつ終わったな」の恐怖}}] {{웨이백|url=http://style.nikkei.com/article/DGXBZO55632600Q3A530C1000000 |date=20170929000714 }} - 닛케이 스타일, 2017년 1월 6일 확인</ref> 그것이 누적되면서 1988년 시즌 도중에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고 이듬해 1989년에는 간기능 장애가 일어났다. 의사로부터 “불규칙한 생활 습관이 계속되면 선수 생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라고 전해들을 정도의 상태가 심각했고 1989년 시즌에는 몇 번이고 2군에 내려가는 일이 반복되자, 4승 8패와 평균 자책점 4.96이라는 저조한 성적을 남겨 전력외 통보까지 각오했다고 한다.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부인 마사코와 결혼할 때 [[청혼|프로포즈]]는 ‘(야구를 그만두고)산에 틀어박혀서 살자’였지만 부인이 “남편이 다시 한 번 야구를 할 수 있는 몸을 갖추고 야구로 기쁨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은퇴를 고심하고 있던 구도를 설득해 부부가 이인삼각으로 체질개선에 나섰다고 한다. 구도는 그 후 1년 간의 재활 훈련을 거쳐 부활했고 이후 컨디션 관리에 세심한 신경을 쓰게 됐다.<ref>《[[정보 라이브 미야네야]]》([[요미우리 TV 방송|요미우리 TV]]), 2010년 8월 6일 방송</ref><ref>[http://www.nippn.co.jp/entertainment/enjoy/wellness/1200316_2042.html {{lang|ja|坂本雄次の訪問!スポーツ人 vol.1 工藤公康さん}}] {{웨이백|url=http://www.nippn.co.jp/entertainment/enjoy/wellness/1200316_2042.html |date=20150916024839 }} - 닛폰 제분</ref>
 
[[1987년 일본 시리즈]]에서 요미우리에게 승리하기 직전 [[1루수|1루]]를 지키고 있던 기요하라가 울음을 터뜨린 것은 많이 알려진 에피소드였지만 이 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9회까지 투구를 했던 사람은 구도였다. 구도는 기요하라를 보면서 ‘타자는 좌타자였던 [[시노즈카 가즈노리|시노즈카]]인데, 기요하라는 눈물 때문에 공이 잘 보이질 않아 인코스를 끌어당겨 타구가 1루로 향하게 되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 1루수에게 타구가 날아오지 못하도록 하여 아웃코스로 승부하는 것을 택했다. 시노즈카를 바깥쪽의 [[슬라이더]]를 던지며 중견수 플라이로 잡고 헹가래 투수가 됐다. 이에 대해 구도를 형처럼 따랐던 기요하라는 본인의 저서에서 “울보인 동생에게 어디까지나 상냥한 성격을 가진 형이었다”,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 구도와 서로 부둥켜 안으면서 마음껏 울었다”라고 감사를 표하는 내용을 적었지만 구도 자신은 경기 후에 가진 인터뷰에서 “(앞으로 남은 아웃카운트가 원 아웃이면 헹가래 투수였기에)승리의 포즈를 어떻게 취해야할지 마운드 위에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요하라가 우는 바람에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라고 대답하면서도 “그 눈물은 정말로 아름다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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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피소드 ==
1980년대 당시 야구 선수들의 일반적인 옷차림은 조금 큰 소매의 골프 셔츠, 조끼, 좁은 바지, 에나멜 구두, 헤어스타일은 네모나게 짧은 머리, 펀치파마가 당연했지만 구도는 DC브랜드, 청바지, 스니커를 맵시있게 신었고 히어로 인터뷰에서 미소를 짓거나 우승이 결정됐을 때 [[헹가래]]를 치는 것에 참여하지 않고 카메라를 향해서 장난치는 등의 퍼포먼스를 종종 보여주었다. 그 때문인지 선배들에게서 호된 비판을 받는 일도 있었지만 1986년 [[신어·유행어 대상]]에서는 그 해의 유행어인 ‘신인류’({{lang|ja|新人類}})를 대표해 [[기요하라 가즈히로]], [[와타나베 히사노부]]와 함께 선정되면서 야구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선구자로 급부상했다.<ref>[https://web.archive.org/web/20101201094607/http://sankei.jp.msn.com/sports/baseball/100120/bbl1001200237000-n1.htm {{lang|ja|【話の肖像画】男のプライド(中)プロ野球投手・工藤公康}}] - MSN 산케이 뉴스(산케이 신문), 2010년 1월 20일</ref><ref>[http://column.sp.baseball.findfriends.jp/?pid=column_detail&id=049-20150831-01 {{lang|ja|みなぎるバイタリティー}}] {{웨이백|url=http://column.sp.baseball.findfriends.jp/?pid=column_detail&id=049-20150831-01 |date=20160304073933 }} - 슈칸 베이스볼 ONLINE, 2015년 8월 21일</ref> 또 와타나베와는 이듬해 1987년 춘계 스프링 캠프 무렵에 [[TV 아사히]] 《[[뉴스 스테이션]]》에서 ‘구도짱 나베짱의 캠프 프라이데이’({{lang|ja|クドちゃんナベちゃんのキャンプフライデー}})라는 코너를 맡았던 적도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 공식 홈페이지에 ‘나의 야구학원’({{lang|ja|僕の野球塾}})이라는 소년 야구 지도 코너를 오랜 세월에 걸쳐 게재된 적이 있어서 미래의 야구 선수를 꿈꾸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트레이닝’의 중요성을 전했다. 전국의 야구 소년으로부터 질문이 쇄도할 정도의 인기 코너로 급부상하자, 데이터로 축적된 양이 방대해졌다. 구도는 2006년에 같은 타이틀의 서적을 [[고단샤]]로부터 간행했다. 이적 후에도 요코하마 구단 홈페이지에 데이터·권리가 인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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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부 링크 ==
{{NPB|51553865}}
* {{언어링크|ja}} [https://web.archive.org/web/20160201022456/http://www.baseball-museum.or.jp/baseball_hallo/detail/detail_189.html 재단법인 야구 전당 박물관 - 구도 기미야스]
* {{언어링크|ja}} [https://web.archive.org/web/20090427172309/http://www.hb-nippon.com/interview/58-hb-nippon-intvw2009/526-intvw2009-31-date20090416no31 고교 야구 정보.com 독점 인터뷰 - 구도 기미야스 선수(2009년 4월 18일 ~ 2009년 4월 24일)]
* {{언어링크|ja}} [https://web.archive.org/web/20150428025011/http://meikyu-kai.org/member/pitcher/kimiyasu_kudoh.html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 구도 기미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