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전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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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2월, [[이재문]], [[신향식]], [[김병권 (1921년)|김병권]] 등이 군사독재정권의 폭정하에 신음하던 [[대한민국]]의 민주화와 한민족의 해방을 목적해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남민전)를 비밀리 조직한다. [[1977년]] 1월,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유인물 [[민중의 소리 (1977년)|민중의 소리]]를 여러 차례 배포하는 등 반유신 투쟁을 전개하고 [[민청학련]]을 위시한 학생운동권을 중심으로 청년학생위원회를 조직한다.
 
무장 혁명을 목표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과 연락을 시도하고 예비군 훈련장에서 총기를 밀반출해 비축하고 폭탄을 사제하던 중 [[민투위 강도 사건]]으로 수사당하게 된다. [[1979년]] [[10월 4일]]부터 11월까지 [[이재문]], [[이문희 (1953년)|이문희]], [[차성환]], [[안재구]], [[이수일 (1953년)|이수일]], [[김남주 (시인)|김남주]], [[이재오]]를 비롯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조직원 84명이 구속당하였다. 공안 기관은 이것을 '북한 공산 집단의 대남 전략에 따라 국가 변란을 기도한 사건', '북한과 연계된 간첩단 사건', '무장 도시 게릴라 조직' 등으로 발표하면서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 등의 협의로 처벌하였다.
 
후일 KBS에서 방영되었던 인물현대사에서 당시 한나라당 국회의원과 늘푸른한국당 대표를 지낸 이재오나 당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들이 한 증언을 보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는 조직이었다기보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등한 처지에서 협상하려고 했던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 성향 단체였다고도 한다.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을 역할 모델로 삼은 자생한 사회주의자, 진보성을 띤 민족주의자의 조직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맹목으로 추종하지는 않았더라도 냉전이 한창이었던 당시로서는 1970년대 민주화운동 세력들 중에서도 상당히 이질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재오 자신은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관련자가 아니고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 소속으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는데 유신정권이 비슷한 시기에 체포된 [[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와 엮었던 것일 뿐이라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