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로마 제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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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교황청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좌 간 계속 이어진 해묵은 갈등은 새로이 기독교화한 불가리아에서 양 세력의 종교상 수위권을 놓고 재대두했다. 이 일로 894년에 불가리아의 강력한 차르 [[시메온 1세]]가 제국을 침공했으나 제국은 외교 수단을 동원해 헝가리인에게 구구해 이 사람들을 물리쳤으나 [[불가로피곤 전투]](896년)에서 로마는 패배했고 불가리아인에게 연공을 바쳐야했다. 912년에 시메온은 한술 더 떠 로마 제국이 자신에게 불가리아 황제인 바실레우스의 관을 부여하고 어린 [[콘스탄티노스 7세]]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끔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차르가 한 계획은 좌절되었으나 그 사람은 트라키아를 재침공해 [[아드리아노폴리스]]를 점령했다.<ref name=Norwich />
 
[[레온 포카스]]와 [[로마노스 레카페노스]]가 이끄는 거대한 원정군이 출정했으나 917년 [[아켈로오스 전투]]에서 제국군은 패하고 이듬해 불가리아는 [[코린토스]]까지 남하하여 북부 그리스를 유린했다. 923년과 아드리아노폴리스는 불가리아 군대의 손아귀에 다시금 떨어졌고 이 사람들은 924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공성전을 벌였다. 927년에 시메온이 죽자 발칸 반도 상황이 그제야 나아졌다. 968년에 불가리아는 [[키예프 루시루스]]의 [[스뱌토슬라프 1세]]에게 침략받았으나 3년 후에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 황제는 [[도로스톨론 전투]]에서 루시를루스를 무찌르고 불가리아 동부를 제국 영토로 회복했다.
 
[[코메토풀리 왕조]]의 지도로 불가리아는 제국에 재저항했으나 [[바실레이오스 2세]](976년~1025년)는 불가리아의 복종을 우선 과제로 삼았으나 바실레이오스의 첫 불가리아 원정대는 [[트라야누스 문 전투|트라야누스 문]]에서 치욕스럽게 패배한 후 몇 년간 황제는 아나톨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느라 불가리아가 발칸 지역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상황을 좌시할 수밖에 없었다. 양 세력 간 전쟁은 거의 20년 가까이 질질 끌었다. 로마 제국은 [[스페르케이오스 전투]]와 [[스코페 전투]]에서 승리해 불가리아 군대를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약화시켰으며, 해마다 작전을 수행해 불가리아의 거점을 조직 성격을 띠게 줄여 나아가 1014년 [[클레이디온 전투]]에서 불가리아는 결국 완벽히 패배했다.<ref name=Angold>{{harvnb|Angold|1997}}.</ref> 야샤에서는 생포된 불가리아 포로들을 100명씩으로 나누어 99명은 눈을 멀게 하고 100번째 병사는 한쪽 눈만 남겨 맹인들을 고향으로 인도하게끔 하였다고 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되지는 않았다. 차르 [[사무일]]은 한때 용맹했던 불가리아 군대의 참상을 보고 충격으로 죽었다. 1018년, 불가리아의 최후 요새가 항복했고 이 나라는 로마 제국의 영토가 되었다. 이 승리로 로마 제국은 헤라클레이오스 시대 이래 처음으로 [[도나우 강]] 국경선을 확보했다.<ref name=Norwich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