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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도쿄'''라는 명칭은 1868년 [[9월]]([[메이지]] 원년 또는 [[게이오]] 4년 [[음력 7월|7월]])에 반포된 칙서인 "에도를 칭하여 도쿄라고 삼음"({{lang|ja|江戸ヲ称シテ東京ト為スノ詔書}})에 따라, [[에도]]의 [[마치부교]](町奉行)가 관할하던 지역을 관할하는 [[도쿄 부]](東京府)가 설치된 것에서 유래한다. "東京"이라는 한자는 [[교토 시|교토]]에서 볼 때 "동쪽의 도읍지"라는 의미를 뜻한다. 메이지 중기까지는 '{{lang|ja|東亰}}'라는 표기 또한 사용되었다. (亰는 京의 속자)
'''도쿄'''라는 명칭은 1868년 [[9월]]([[메이지]] 원년 것을 검토하였으나, 당시 교토의 귀족들과 관인들의 반발이 컸던 이유로 일단 "에도 또한 도읍지이다"라고 선언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에도 또한 (일본의) 도읍지가 된 이상 천황은 에도(도쿄)에서도 행정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라는 빌미로 천황의 이동<ref>천황의 거둥을 교코(行幸)라 함</ref>이 계획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11월(메이지 원년 10월)에 도케이 성(구 [[에도 성]])에 들어갔고 그 후 한번은 교토에 돌아온다. [[1869년]] [[5월]](메이지 2년 [[음력 3월|3월]])에 다시 도쿄(이 당시 도케이 성이 "황성"이 되었음)로 이동하였으며, [[대정관|관]]({{lang|ja|太政官}}) 또한 이동하게 되었다.
 
이 지역이 "도쿄"라는 발음으로 굳어진 것은 [[메이지]]시대 중기였고, 이전에는 "도케이"({{lang|ja|トウケイ}}, 한자 표기는 東京)라고 불리어왔다. 흔히 도쿄와 요코하마를 묶어 말하는 [[게이힌 공업 지대]](京濱工業地帶), [[케이힌 급행 철도]], [[게이오 철도]] 등에서 "케이"(京)는 과거 도쿄를 읽던 다른 이름인 "도케이"에서 유래한 것이다.
 
'''도쿄'''라는 명칭은 1868년 [[9월메이지 유신]]에 의한 신(新) 정부 수뇌진은 [[메이지에도]] 원년천도하는 것을 검토하였으나, 당시 교토의 귀족들과 관인들의 반발이 컸던 이유로 일단 "에도 또한 도읍지이다"라고 선언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에도 또한 (일본의) 도읍지가 된 이상 천황은 에도(도쿄)에서도 행정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라는 빌미로 천황의 이동<ref>천황의 거둥을 교코(行幸)라 함</ref>이 계획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1868년 11월(메이지 원년 10월)에 도케이 성(구 [[에도 성]])에 들어갔고 그 후 한번은 교토에 돌아온다. [[1869년]] [[5월]](메이지 2년 [[음력 3월|3월]])에 다시 도쿄(이 당시 도케이 성이 "황성"이 되었음)로 이동하였으며, [[대정관|관]]({{lang|ja|太政官}}) 또한 이동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 천황과 정부가 교토로 돌아오는 일은 더이상 없게 되면서, 사실 상의 '도쿄 천도'가 이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까지 '도쿄 천도' 자체는 일본 법령에 의해 명시되어 있지 않으며 일본에서는 도쿄를 수도로 직접 정한 법령 또한 존재하지 않으나 [[간토 대지진]] 직후인 [[1923년]] [[9월 12일]]에 발표된 [[다이쇼 천황]]의 칙어 중에 "도쿄는 제국([[일본 제국]])의 수도로 하고"({{lang|ja|東京ハ帝国ノ首都ニシテ}})라는 문헌이 남아 있다. 그러나 교토 어소는 지금까지 폐지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으며 경내의 [[시신덴]](紫宸殿)에는 천황이 있는 곳임을 나타내는 어좌가 안치되어 있다. 이에 따라 천도를 부정하는 의견 또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