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골과 진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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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설 ==
또 성골은 경주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자격을 가진 최고의 골품이었다. 진골은 왕족이었으나 왕이 될 자격은 없었다. 그리고 전(前) 왕족이요, 또 왕비족인 박씨나 본가야의 왕실인 신김씨(新金氏)도 진골에 포함되어 있었다. 같은 왕족이면서도 성골과 진골로 구별되는 것은 모계(母系)에 의한 것인 듯하다.또 정치적인 면에서 구분하여 왕실 직계의 왕위 계승자 및 왕위 계승을 보유할 수 있는 제한된 근친자를 포함하여 성골이라 칭하고, 그 외 왕위 계승에서 소외된 왕족을 진골이라 하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일반적으로 시조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의 왕족은 성골, 무열왕 이후의 왕족을 진골이라고 해석하나, 성골은 불교가 들어와 신라의 사상 통일에 있어서 이념이 된 법흥왕 때부터 형성된 듯하며, 불교에서 종교적 신성 개념을 받아들여 왕실 자신이 신성 가족으로 자처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무열왕부터 왕족의 신분이 성골에서 진골로 전환된 것은 신라 왕족의 혼인 관계의 변천, 즉 새로운 왕비족의 대두에 따라 일어난 현상이라고 하겠다.그러나 신라와 당(唐) 사이의 정치·외교적인 관계가 중요시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원래는 성골만이 왕이 될 자격이 있었으나, [[선덕여왕]] 때가 되어 성골 출신의 남자가 하나도 없게 되자, 진골 출신도 왕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삼국유사]]》는 이때의 상황을 "성골남진(聖骨男盡)"이라고 표현했다.
 
진골과 성골의 차이나 구분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고 여러가지 가설만 존재한다. 1. [[진흥왕]]의 직계(성골) 및 방계(진골)를 구별하기 위한 표현이다. 2. 성골은 왕족 내부의 혼인(족내혼(族內婚, 즉 근친혼))으로 태어난 집단이고, 진골은 왕족과 다른 귀족의 혼인(족외혼(族外婚))으로 태어난 집단이다. 3. 같은 왕족이면서도 성골과 진골로 구별되는 것은 모계(母系)에 의한 것인 듯하다. 4. 또 정치적인 면에서 구분하여 왕실 직계의 왕위 계승자 및 왕위 계승을 보유할 수 있는 제한된 근친자를 포함하여 성골이라 칭하고, 그 외 왕위 계승에서 소외된 왕족을 진골이라 하였다고 하는 견해도 있다.
 
일반적으로 시조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의 왕족은 성골, 무열왕 이후의 왕족을 진골이라고 해석하나, 성골은 불교가 들어와 신라의 사상 통일에 있어서 이념이 된 법흥왕 때부터 형성된 듯하며, 불교에서 종교적 신성 개념을 받아들여 왕실 자신이 신성 가족으로 자처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한다. 또한 무열왕부터 왕족의 신분이 성골에서 진골로 전환된 것은 신라 왕족의 혼인 관계의 변천, 즉 새로운 왕비족의 대두에 따라 일어난 현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신라와 당(唐) 사이의 정치·외교적인 관계가 중요시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화랑세기》는 진골과 성골을 각각 진골정통, 대원신통으로 표현하는데, 전자는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 박씨 계통을, 후자는 지소태후 계통을 일컫는다. 그러나 이 역시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지는 않으며,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진골, 성골과 바로 일치하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신라가 [[태종 무열왕]] 이래로 국세를 신장하게 되면서, 진골은 기존의 왕족뿐 아니라, 정복지의 왕족까지 흡수하는 표현이 된다. 한 예로, [[가야]]의 왕족 김씨의 후손인 [[김유신]]은 진골 대접을 받았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부흥운동의 지도자였던 [[안승]]도 김씨 성을 하사받고 진골 대접을 받았다.
 
[[신라의 관직|신라 관직]] 상에서 [[이벌찬|1등급]]부터 5등급 까지는 진골 이상의 출신들만 들어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