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라 히틀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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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라는 [[오스트리아]] 하펠트({{lang|de|Hafeld}})에서 태어났는데, 6살 때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가 사망하고 13살때 [[클라라 히틀러]]가 사망해서 대신 [[아돌프 히틀러]]의 도움을 받으며 자랐다. 아돌프 히틀러는 어머니가 사망할 때 오스트리아 정부가 제공한 적은 연금을 그녀의 몫으로 배정해 놓고 부모의 유산을 공평히 나누어 사용하는 등 아돌프는 그의 동생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였었다.<ref>Philippe Sand, "East West Street - On the Origins of 'Genocide' and 'Crimes Against Humanity'", New York, 2016 p. 96 (kepub edition)</ref>
 
후에 파울라는 비서로 일하게 되어 [[빈]]으로 이사했으나 이때는 히틀러와 접촉을 하지 못했는데, 당시 히틀러는 비엔나 아카데미의 시험에 낙방하여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시절이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정부의 징병을 피해 1912년 [[뮌헨]]으로 가 1914년 1차대전이 발발하자 바바리아바이에른 연대에 병으로 입대함으로써 전쟁 중은 물론이고 파울라는 히틀러와 1920년대까지 전혀 접촉을 하지 못했고 1921년에야 겨우 만날 수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헤어진 날과 너무 큰 괴리가 있어 그녀는 매우 놀랐고 심지어 초면에 히틀러를 알아보지도 못했다고 그녀는 말했다.<ref>"[[The Mind of Adolf Hitler]]", Walter C. Langer, New York 1972, pp. 122–123.</ref>
 
그 후에도 히틀러와 파울라는 같이 쇼핑하러 가기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1929년 히틀러가 새로히유력 정권의 일인자로정치인으로 부각되기 시작하자 파울라는 히틀러를 1년에 한 번 정도 밖에 보지 못했고,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수상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거의 접촉하지도 못했다. 나중에 파울라는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히틀러가 그녀를 1년에 한 번 찾아왔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히틀러는 그녀가 유일한 여동생이었으므로, 그녀가 빈의 보험회사 비서 일자리를 잃은 1930년부터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할 때까지 정부 재정으로 정기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고 한다. 또한 파울라는 히틀러의 도움으로 군사 병원에서 비서로 일했으므로 재정상에는 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파울라는 정치적으로정치적으로는 히틀러와 연관이 없었으며 나치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ref>{{서적 인용| url=https://archive.org/stream/in.ernet.dli.2015.149663/2015.149663.Inside-Europe#page/n43/mode/2up | title=Inside Europe |location=New York| publisher=Harper & Brothers | author=Gunther, John |authorlink=John Gunther| year=1940 | page=21}}</ref>
 
전쟁이 거의 끝나갈 시점인 1945년, 즉 49살일 때 파울라는 [[마르틴 보어만]]의 요청으로 [[베르히테스가르덴]]에 가 오버잘츠베르크({{lang|de|Obersalzberg}})의 히틀러 별장 베르크호프({{lang|de|Berghof}})에서 여러 가지 소일을 맡았는데, 여기서 파울라는 히틀러의 동생이라는 점을 이유로 1945년 5월 미국 정보부(OSS)에 검거되었다. 이때서야 파울라는 그저 친절한 오빠 정도였던 아돌프가 [[홀로코스트]]와 [[2차대전]] 발발에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지만, 후의 OSS 장교가 증언에 밝힌 바에 의하면 그녀는 그러한 사실들을 '자매다운 충실한 표현으로 전적으로 부인했다' 고 말한 바 있으며, [[에바 브라운과브라운]]과 오직 한 번 만났다고도 했다. 얼마 되지 않아 풀려난 파울라는 빈으로 돌아가 자신이 저축한 예금으로 살며 예술/공예품 상점에서 일하다가 1952년 독일의 베르히테스가르덴으로 돌아가 투룸 형식의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ref>Fritz Redlich, ''Hitler:Diagnosis of a Destructive Prophet'', Oxford University Press, New York, 1999, p.10</ref>
 
[[1959년]] 1월 파울라는 영국 텔레비션 방송인 《Associated-Rediffusion》 의 피터 머레이({{lang|de|Peter Morley}})와의 인터뷰에 동의하여 ‘{{lang|en|The Years of Adolf Hitler}}' 라는 다큐멘터리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 프로그램에서 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오빠인 히틀러의 유년기를 소개했고, 이 인터뷰에서 히틀러의 생애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새롭게 밝혀졌다. 인터뷰 후 1년 후인 [[1960년]] [[6월 1일]], 64세의 나이로 그녀는 사망했다. 파울라가 결혼을 하지 않아 아이가 없었으므로 히틀러 가문의 직계는 여기서 끝이 났으며, 그녀는 마지막으로 살던 베르히데스가덴/쇠나우({{lang|de|Berchtesgaden/Schönau}})의 베르크프라이트호프({{lang|de|Bergfriedhof}})에 묻혔고, 나중에 알트프라이드호프({{lang|de|Altfriedhof}})로 이장되었다. 현재에도 그 비석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녀의 관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ref>[http://www.thirdreichruins.com/bgaden.htm Berchtesgaden] (the second burial is Cornelia Reif, 2 February 1925 – 3 June 2005).</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