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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박사'''(五經博士)는 [[중국]] [[한나라]] 때 《[[시경|시]](詩)》·《[[서경 (책)|서]](書)》·《[[역경|주역]](周易)》·《[[예기]](禮記)》·《[[춘추]](春秋)》의 [[사서오경|오경]](經)마다 박사관(博士官)을 두어 제자를 양성시켜서 [[유교|유학]]의 보급 발달을 도모하는 제도이다. [[한국]]의 [[백제]]에서도 시행했다.
 
서민준 실홥니까
== 중국 오경박사의 역사 ==
오경박사라고 하는 학관(學官) 자체는 이미 [[전국 시대]]의 여러 나라에 설치되어 있었다. [[진나라|진]](秦)의 [[진 시황제|시황제]] 때에도 다수의 박사가 있었고, 진의 제도를 받아 이은 한(漢)에서도 숙손통(叔孫通) 이후 여러 종류의 박사를 두었다. 한의 [[한 문제|문제]]·[[전한 경제|경제]](景帝)시대(기원전 2세기 전반)에는 이미 유학에 관하여 《시》, 《서》, 《춘추》의 3종의 박사관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것을 5경박사에까지 진전시킨 것은 [[전한 무제|무제]](武帝) 즉위 초년의 [[동중서]](董仲舒)의 상주였고, 실제로 5경박사가 설치된 것은 [[건원 (전한)|건원]](建元) 5년([[기원전 136년]])의 일이라고 하는 것이 통설이다. 다시 [[원삭 (전한)|원삭]](元朔) 5년([[기원전 124년]])에는 승상 공손홍(公孫弘)의 상주를 기본으로 하여 각 박사관에 제자 50명을 증원하고, 유학의 교양이 있는 관리를 특히 승진시키는 방침이 취해졌다. 이렇게 하여 유학을 배우는 것이 입신출세에 결부된 결과, [[전한]]말(前漢末)부터 [[후한]](後漢)에 걸쳐 유학은 크게 유행하여 “일경(一經)의 설은 백여 만 가지에 이르고, 대사(大師)의 무리는 천여 명에 이른다”라고 할 정도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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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의 오경박사 제도 ==
백제에는 일찍부터 박사 제도가 있었다. 오경박사 이외에도 여러 가지 명칭의 박사가 있었으나 오경박사가 가장 중요시되었으며, 이들은 특히 [[일본]]에 초빙되어 문명을 계발하는 데 공헌하였다.
 
* [[김문정]]
 
==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