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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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년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는 로마 제국의 패권을 놓고 [[막센티우스]]와 다투게 되었다.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던 콘스탄티누스 1세는 [[테베레 강]] [[밀비오 다리]]에서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게 되는데 전투가 시작되기 전 그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에게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했을 때, 공중에서 빛나는 십자가와 ‘이것을 가지고 승리하라’는 문구를 보았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어로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키(Χ)와 로(Ρ)로된 군기를 만들어 가지고 싸워 승리했다고 한다. 이 밀비오 전투의 승리로 콘스탄티누스는 로마 제국의 주인이 됐고 그리스도를 수호신으로 숭배하게 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75133&ACID=44&S=|제목=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17) 콘스탄티누스의 개종|날짜=2001-04-22|출판사=가톨릭신문|확인날짜=2012-4-29|저자=김상재 기자}}</ref> 313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밀라노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법적으로 공인하여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으며,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테살로니카 칙령]]을 내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였다. 이로써 300년 간의 혹독한 박해를 이겨낸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가교회]]가 됐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화는 광범위한 복음전파와 함께 대중의 대량 입교로 인해 양적으로 성장했다. [[초기 7대 세계 공의회]] 시기에 부각된 [[로마 교구|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구|콘스탄티노폴리스]], [[안티오키아 그리스 정교회|안티오키아]], [[예루살렘 그리스 정교회|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그리스 정교회|알렉산드리아]] 등 다섯 [[주교좌]]는 6세기 중엽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에 의해 [[펜타르키아]]가 성립되면서 공식적으로 정리되었다.<ref name="Valliere2012">Paul Valliere, [http://books.google.com/books?id=Qrt3Z7fyzlUC&pg=PA92&dq=Justinian+pentarchy&hl=en&sa=X&ei=QYexUuLQDsiS7Qa26oC4BA&ved=0CE4Q6AEwBg#v=onepage&q=Justinian%20pentarchy&f=false ''Conciliarism'']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2 {{ISBN|978-1-107-01574-6}}), p. 92</ref><ref name="Bartholomew2008">Patriarch Bartholomew, [http://books.google.com/books?id=4_UB3_UpIcQC&pg=PA3&dq=Justinian+pentarchy&hl=en&sa=X&ei=iouxUuumMZCBhAf84oCAAg&ved=0CDUQ6AEwATgU#v=onepage&q=Justinian%20pentarchy&f=false ''Encountering the Mystery''] (Random House 2008 {{ISBN|978-0-385-52561-9}}), p. 3</ref> 특히 로마는 기독교 공동체 박해의 주무대였으며, 베드로와 바오로 두 사도의 순교지라는 특수한 의미와 배경 때문에 초대 교회 때부터 일치의 기준이었고 가시적인 정점으로서 다른 주교좌들에 비해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로마는 종종 스승처럼 다른 지역 교회와 공동체의 문제에 가르침을 내렸다. 한 예로, [[교황 클레멘스 1세|클레멘스 1세]]가 코린토스 교회의 내부 분쟁에 직접 개입했다는 사실은 로마 주교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알려준다. 당시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은 로마를 방문해 로마 공동체와의 일치를 확인하고 보장받곤 했다.<ref>{{웹 인용|url=http://www.catholictimes.org/view.aspx?AID=171117&ACID=44&S=|제목=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8) 로마교회의 기원|날짜=2001-01-14|출판사=가톨릭신문|확인날짜=2012-4-29|저자=박영호 기자}}</ref>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오늘날의 [[이스탄불]]인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전하였다. 그리고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 주교좌를 로마 주교좌에 이어 교회 내 서열 2위의 위치로 격상하는 교령을 제정하여 이에 대한 법적 유효성 논쟁이 벌어졌다.<ref name=Michalopulos>George C. Michalopulos,[http://www.aoiusa.org/canon-28-and-eastern-papalism-cause-or-effect/ "Canon 28 and Eastern Papalism: Cause or Effect?"] {{웨이백|url=http://www.aoiusa.org/canon-28-and-eastern-papalism-cause-or-effect/ |date=20130110112941 }}</ref> 한편, 350년경부터 500년경에 거쳐 더는 제국의 수도가 아닌 로마의 주교인 교황들이 끊임없이 영향력을 확대해가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ref name="ReferenceA">"Rome (early Christian)." Cross, F. L., ed., ''The 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5</ref>
 
수세기 동안 로마 제국을 침입한 [[게르만족]]의 거의 대부분은 [[보편교회]]에서 [[이단]]으로 단죄한 [[아리우스주의]]를 추종하였다. 게르만 군주들과 보편교회 사이에 발생한 종교적 불화는 497년 [[프랑크족]] 군주 [[클로비스 1세]]가 정통 보편 기독교 신앙으로 회심하고 교황 및 수도원들과 동맹 관계를 맺음으로써 평화롭게 일단락되었다. 뒤이어 589년에는 스페인의 동고트족이서고트족이 기독교신앙으로 회심하였으며,<ref>Le Goff, p. 21</ref> 7세기에는 이탈리아의 랑고바르드족도 회심하였다.
 
보편교회 시절 [[서방 기독교]] 지역에서는 특히 수도원들을 통해 미술([[채색 필사본]]을 참조하라)과 읽고 쓰는 능력을 배양하여 [[고전 고대 문명]]을 보존하였다.<ref>''How The Irish Saved Civilization: The Untold Story of Ireland's Heroic Role from the Fall of Rome to the Rise of Medieval Europe'' by Thomas Cahill, 1995.</ref><ref name=Cahill_Thomas>Cahill, Thomas. ''How the Irish Saved Civilization''. Hodder and Stoughton, 1995.</ref> [[누르시아의 베네딕토]](480년경 - 543년)는 성경에 근거를 둔 수도원 규율을 저술하여, 모든 서방 수도자의 영적인 삶의 지침서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고대 문화의 보존 및 전달과 함께 베네딕도회의 전통을 널리 전파하여 유럽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편으로는 [[골룸바노]]와 [[골룸바]]와 같은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사람들을 교육하고 수도원들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