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가톨릭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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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서유럽의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이 세계 전역으로 뻗어 나갔다. 특히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로마 가톨릭 국가들은 서구의 식민지 정책에 있어 큰 역할을 하였다. 이들 나라들의 활발한 탐험과 정복 활동을 통해 식민지들의 사회적·정치적 일대 변화가 일어나면서 동시에 가톨릭 신앙이 아메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로 널리 전파될 수 있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새로이 발견된 땅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으며,<ref name="Koschorke13">Koschorke, p. 13, p. 283</ref> 뒤이어 이들 나라에 국왕 교회 보호권을 부여하여 식민지의 새 성직자 임명권을 바티칸이 아니라 세속 국가 정부가 갖는 것을 허용하였다.<ref>Hastings (1994), p. 72</ref> 1521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필리핀을 처음으로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ref name="Koschorke21">Koschorke, p. 21</ref> 다른 한편, 스페인의 예수회원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주도 아래 포르투갈의 선교사들이 인도와 중국, 일본에 복음을 전하였다.<ref name="Koschorke3">Koschorke, p. 3, p. 17</ref>
 
17세기 중반부터 [[계몽주의]]가 서구 사회를 휩쓸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의구심과 반발심이 생겨났으며,<ref name="Pollard8">Pollard, pp. 7–8</ref> 18세기에는 [[볼테르]]와 같은 문학가들과 [[백과전서]] 편집자들이 교회를 강력하게 비평하는 글들을 썼다. 그들이 비난한 것 중의 하나는 1685년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100여년간에 걸친 개신교 위그노교도들에 대한 종교적 관용의 상징이었던 [[낭트 칙령]]을 철회하고, [[퐁텐블로 칙령]]을 새로이 반포한 것이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면서 권력의 중추가 교회에서 혁명 정부로 이동하였으며, 프랑스 전역에서 수많은 성당이 파괴되고 [[이성 숭배]]가 들어섰다.<ref name="Bokenkotter285">Bokenkotter, pp. 283–285</ref> 1798년에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장군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교황 비오 6세]]를 사로잡아 감금하였다. 비오 6세는 결국 끝끝내끝내 프랑스군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나폴레옹은 나중에 1801년 [[정교협약]]을 체결함으로써 프랑스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재건되었다.<ref name="Collins176">Collins, p. 176</ref> 나폴레옹 전쟁이 종식되면서 프랑스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재부흥하였으며, [[교황령]]도 회복되었다.<ref>Duffy, pp. 214–216</ref>
 
[[교황 비오 9세]]는 1851년부터 1853년까지 주교들의 자문을 구한 후, 1854년 대다수 주교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마리아의 [[원죄 없는 잉태]]를 [[교의]]로 공식 선언하였다.<ref>{{웹 인용|url=http://www.vatican.va/holy_father/john_paul_ii/audiences/alpha/data/aud19930324en.html |title=John Paul II, General Audience, March 24, 1993 |publisher=Vatican.va |date=1993년 3월 24일 |accessdate=2011년 6월 30일}}</ref>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황 무류성]]의 교리적 정의를 내렸다.<ref name="Leith">Leith, ''Creeds of the Churches'' (1963), p. 143</ref><ref name="Duffy232">Duffy, ''Saints and Sinners'' (1997), p. 232</ref> [[교황 무류성]]과 기타 문제들에 있어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정에 반발하여 독립한 무리는 스스로 [[구 가톨릭교회]]라고 자처하고 있다.<ref name="Fahlbusch">Fahlbusch, ''The Encyclopedia of Christianity'' (2001), p. 729</ref>
 
1860년대 교황령을 포함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일어난 결과, 교황 비오 9세 치세에 [[이탈리아 왕국]]이 로마를 점령하면서 교황령은 사라지게 되었고, 천년 간 이어져오던 교황의 세속 권력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탈리아 정부는 [[교황 보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에게 연금을 제공하고, 일신상 불가침권과 영적 기능의 자유로운 행사를 보장하겠다고 교황에게 제의하였으나 교황은 이 제의를 일축하였고, 바티칸에 들어앉아 스스로 ‘[[바티칸의 포로]]’로 자처하였다.<ref>[http://books.google.com/books?id=y_4eaFsFdI4C&pg=PT155&dq=Kertzer+%22papal+prisoner%22&hl=en&sa=X&ei=A1scUp2fBomp7Ab67IHYDQ&redir_esc=y#v=onepage&q=Kertzer%20%22papal%20prisoner%22&f=false David I. Kertzer, ''Prisoner of the Vatican'' (Houghton Mifflin Harcourt 2006 {{ISBN|978-0-54734716-5}}][[국제 표준 도서 번호|ISBN]]&nbsp;[[특수:책찾기/978-0-54734716-5|978-0-54734716-5]][[국제 표준 도서 번호|ISBN]]&nbsp;[[특수:책찾기/978-0-54734716-5|978-0-54734716-5]]<span>)</span></ref> 이후 영토 분쟁으로 인한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간의 교착 상태가 한동안 이어지다가 1929년 파시스트 [[무솔리니]]정부와 [[라테라노 조약]]을 체결해 해결되었다. 이 조약에서 교황청은 과거 교황령이었던 지역에 대한 이탈리아의 통치권을 인정하였으며, 이탈리아는 그 대가로 바티칸을 독립국가로 따로 분류하여 그곳에 대한 교황의 통치권을 인정하였다. 이리하여 [[바티칸 시국]]이 세워지게 되었다.
 
=== 20세기 ===
20세기는 정치적으로 근본주의적이고 [[반성직자주의]]적 성향의 정부들이 증가한 시대였다고 볼 수 있다. 1926년 멕시코에서 정교 분리를 내세운 칼레스법이 통과되어, 3천 명 이상의 사제들이 추방당하거나 살해당했으며,<ref name="Scheina">Scheina, p. 33.</ref> 성당들은 세속적인 용도로 사용되었고, 전례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수녀들은 강간당하고 수감당한 사제들은 총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ref name="Chadwick264"/> 결국 [[크리스테로 전쟁]]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ref name="Chadwick264">Chadwick, Owen, pp. 264–265</ref> 러시아에서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수립된 [[소비에트 연방]] 정부의 주도로 1930년대까지 현지에 있는 가톨릭교회가 박해당하였다.<ref>Riasanovsky 617</ref> 수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들, 평신도들이 처형이나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교회 재산은 압류당했으며, 모든 성당이 사실상 문을 닫게 되었다.<ref name="Riasanovsky 634">Riasanovsky 634</ref>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전개된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가톨릭교회는 [[사회주의]]를 표방한 [[인민 전선 (스페인)|인민 전선]] 정부의 교회에 대한 [[적색 테러 (스페인)|적색 테러]]<ref>Alonso, pp. 395–396</ref>에 대항하기 위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스트들과 동맹을 맺었다.<ref>Payne, p. 13</ref> [[교황 비오 11세]]는 이들 세 나라를 ‘끔찍한 삼위일체’로 언급하면서 결국 몰락할 것이며,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이들에 대해 침묵을 지키며 방관하는 것은 사실상 묵인한 것이나 다름없다면서 크게 질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