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토 아키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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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무토 아키라는 [[구마모토 현]] 출신으로, 구마모토[[1913년]]에 현립[[일본 세이세이코육군사관학교]]를 고등학교를 거쳐졸업하였다. [[1913년1920년]]에 일본 육군 대학교를 졸업하였고, [[육군사관학교1937년]]에는 (일본)|육군사관학교[[루거우차오 사건]] (25기)를발생 졸업하였으며당시, 도미나가참모 교지,본부 사토작전 고토쿠,과장으로서 야마우치중국에 마사후미,대한 강경 다나카정책을 신이치주장해, 야마자키12월에는 야스요중지나 등이방면군 그의참모장에 동기이다다다랐다.
 
[[1939년]]에 육군성 군무 국장, [[1942년]]에는 근위 제2사단장(수마트라와 메단), [[1944년]]에 일본 제국 제14방면군 ([[필리핀]]) 의 참모장으로 취임하였다. 무토 아키라는 종전을항복할 맞이할 때당시에 [[필리핀]]에 있었지만, [[극동 국제 군사 재판]]으로 인해 [[일본]]에 되돌아왔다.
그는 [[1920년]]에 육군 대학교(32기)를 졸업하였으며, [[1937년]], [[루거우차오 사건]] 즈음에 참모 본부 작전 과장으로서 대 중국 강경 정책을 주장해, 12월에는 [[중지나방면군]] 참모장에 다다랐다.
 
전후[[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포로 학대 죄에죄로 의해인해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 구치소|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39년]]에 육군성 군무 국장, [[1942년]]에는 근위 제2사단장(수마트라와 메단), [[1944년]]에 일본 제국 제14방면군 ([[필리핀]]) 의 참모장으로 취임하였다. 무토 아키라는 종전을 맞이할 때 [[필리핀]]에 있었지만, [[극동 국제 군사 재판]]으로 인해 [[일본]]에 되돌아왔다.
 
무토 아키라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이유에 대해 육군성 군무장관으로서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의 책임이 거론되었기 때문인가, 제14방면군 참모장으로서 [[필리핀]]에서 [[미국]]과 싸운 책임이 거론되었기 때문인가로 의견이 나뉘었지만, [[다나카 류키치]] 일본 육군 [[군인 계급|소장]]이 "그 남자가 군 중추로, 권력을 잡아 대미 개전을 강행하였다" 라고 증언한 것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전후,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포로 학대 죄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고, [[1948년]] [[12월 23일]], [[스가모 구치소|스가모 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무토 아키라가 극동 국제 군사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이유에 대해 육군성 군무장관으로서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의 책임이 거론되었기 때문인가, 제14방면군 참모장으로서 [[필리핀]]에서 [[미국]]과 싸운 책임이 거론되었기 때문인가로 의견이 나뉘었지만, [[다나카 류키치]] 육군 [[군인 계급|소장]]이 "그 남자가 군 중추로, 권력을 잡아 대미 개전을 강행하였다" 라고 증언한 것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았다고 전해지고 있어,이에 [[도조 히데키]]는 판결 후, 무토 아키라에게 "연루시켜 미안하다. 네가 사형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라는 의외의 느낌을 나타냈다고 한다. 무토와 다나카는 서로에게 혐오감을 가지고 있어 무토 아키라는 다나카 류키치가 군부 내에서의 움직임을 법정에서 폭로했던 것에 대해 사사가와 료이치에게 "내가 만일 교수형이 된다면, 다나카의 몸에 씌어서 미쳐 죽게해주마"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일본 육군성 군무 국장 시절, [[도조 히데키]]와 생각이 어긋남에 따라 군 중추 세력과 근위 제2사단장을 멀리하게 되었다. 도조 히데키의 실각 후에는 제14방면군 사령관에 임명된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바람에 따라 제14방면 참모장에 임명되었고, 후에 [[필리핀]]에서 항복의 순간을 맞이했다.
 
{{토막글|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