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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4년]]([[인덕]] 원년) 칙사 유인원의 주재로 신라의 [[김인문]]·[[김천존]]과 화친을 맹약했다.<ref>《삼국사기》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4년</ref> 10월(음력) 대방주[[자사 (관직)|자사]](帶方州―) 겸 검교웅진도독 유인궤가 표를 올려 비로소 웅진도독이 되었고<ref>《자치통감》201권 당기 제17 고종 인덕 원년. 《자치통감》에는 웅진 [[도위]](都尉)라고 하였으나 도독의 오기이다. 《구당서》유인궤전과 《신당서》유인궤전에는 도독이라고 하였다.</ref> 이내 남부여군공에 봉해지고 웅진도총관 겸 마한도안무대사(馬韓道安撫大使)에 임명되어 유민들을 통치하였다.<ref name="카를 융" /> [[665년]] 유인원이 다시 칙사로 와서 신라 [[문무대왕]]과 취리산(就利山) 회맹을 주선하니 드디어 옛 땅 일부에 대한 지배를 용인받고<ref>《삼국사기》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5년</ref> 1도독부 7[[주 (행정 구역)|주]] 51[[현 (행정 구역)|현]]을 획정하였다.<ref>《삼국사기》37권 잡지 제6 지리4 백제</ref> 직후에 유인궤와 함께 당나라로 건너가서 [[666년]]([[건봉]] 원년) 고종의 봉선(封禪)에도 참여하였다.
악화되던 나당관계가 고구려 멸망 후 표면화되면서 웅진도독부와 신라는 전투를 벌였고 결국 [[672년]]([[함형]] 3년)에 웅진도독부는 신라에 의해
=== 사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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