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요시노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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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Yoshinobu Tokugawa 2.jpg|섬네일|오른쪽|말년의 도쿠가와 요시노부 [[공작]]]]
 
[[1869년]]([[메이지]] 2년) 9월, 무진전쟁(戊辰戦争)의 종결을 맞아 그의 근신도 풀렸다.<ref>「第942 徳川慶喜ノ謹慎ヲ免ス」[https://dl.ndl.go.jp/info:ndljp/pid/787949/229 『法令全書 明治2年』内閣官報局、p.384]</ref>引き続き、슨푸를이후로도 그는 슨푸 고쳐 시즈오카(静岡)에서 살았다. 생존 중에 쇼군직을 물러난 것은 11대 [[도쿠가와 이에나리|이에나리]](家斉)도 그러했으나, 오고쇼(大御所)로써 정치 실권을 쥐었던 그들과는 달리 요시노부는 정치적 야심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윤택한 은거 수당을 가지고 사진 찍기 ・ 사냥 ・ 고기 잡기 ・ [[바둑]] ・ 요곡(謡曲) 등의 취미에 몰두하는 생활을 보냈고, 「케이키 님」(ケイキ様)이라고 불리며 시즈오카 사람들에게는 친근한 상대였다. 한편으로 옛 막부 신료들이 찾아와도 [[시부사와 에이이치]](渋沢栄一)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 함께 시즈오카로 이주해 살았던 옛 도쿠가와 가신들이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어도 무관심했으며 때문에 「귀하신 분들은 사람의 정을 모른다」(貴人情を知らず)라는 원망의 소리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897년]](메이지 30년) 11월에 도쿄(東京)의 스가모(巣鴨)로 옮겼다. 이듬해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有栖川宮威仁親王)의 중개로 고쿄(皇居)가 된 옛 에도 성에 찾아가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기도 했다.
 
[[1901년]](메이지 34년) 12월에 고이시카와 구(小石川区) 고히나타 제6천정(小日向第六天町, 지금의 분쿄 구文京区 가스가春日 2초메丁目)의 고다이(高台) 저택으로 옮겨 살았으며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ref>오늘날 저택 부지의 대부분은 일본 국제불교학대학원대학(国際仏教学大学院大学)이 세워져 있다.</ref> [[1902년]]([[메이지]] 35년) 공작(公爵)의 작위를 받았고, 도쿠가와 종가와는 따로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徳川慶喜家)를 일으켜 귀족원(貴族院) 의원에도 취임하였고 35년에 걸쳐 정치에 나서게 되었다(다만 완전한 명예직으로 능동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는 못했고, 뭔가 역사에 남길 만한 일을 한 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