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위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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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위기'''는 [[프랑스 제3공화정|프랑스]] [[스페인 왕국|스페인]]. [[독일 제국|독일]]이 모로코 영토 분할을 두고 대치하게 된 사건이다.
 
==* [[제1차 모로코 위기==]]
==* [[제2차 모로코 위기==]]
1904년 [[프랑스 제3공화정|프랑스]]는 [[스페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모로코를 분할하기로 했으며, [[모로코]]에서 자유로운 권리를 보장받는 대가로 [[영국]]의 [[이집트]] 진출을 반대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독일 제국|독일]]은 모로코의 문호개방을 주장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제국의 막강한 힘을 극적으로 과시하면서 [[탕헤르]]를 방문했고, 1905년 3월 31일 자신의 요트에서 모로코의 독립과 주권국가임을 선포했다.
 
{{disambig}}
이로 인해 "제1차 모로코 위기"라 불린 국제적 위기상황이 발생했다. 결국 이 사건은 1906년 1~4월에 열린 [[알헤시라스 회의]]로 위기를 벗어났는데, 여기서 독일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경제적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의 치안담당 권리를 확보했다. 1908년 2월 18일에는 프랑스와 독일의 2차 회담이 열려 모로코의 독립을 재확인하는 한편 프랑스의 "특수한 정치적 이익"과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의 경제적 이익이 인정되었다.
 
[[en:Moroccan Crisis]]
==제2차 모로코 위기==
제2차 모로코 위기([[1911년]])는 [[모로코]]에서 지역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1911년 7월 1일 독일이 모로코의 [[아가디르]] 항(港)에 전함 '판터호'를 파견하면서 발생했다. 독일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했으나, 사실은 프랑스를 위협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 [[아가디르 사건]]으로 그해 여름과 가을 동안 전쟁 이야기가 오르내렸으나, 국제협상이 계속된 끝에 1911년 11월 4일 회담이 타결됨으로써 위기를 넘기게 되었다.
 
이 회담에서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으며 대신 독일은 프랑스령 콩고 영토의 일부를 할양받았다. 스페인은 처음에는 이러한 결정에 반대했지만, 영국의 중재를 통해 1911년 11월 27일 프랑스-스페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모로코에서의 프랑스-스페인 경계를 약간 수정할 수 있었다. 1911 ~ 1912년에 열린 열강의 협상으로 탕헤르와 그 주변지역은 국제화되었다.
 
{{글로벌}}
 
{{토막글|정치}}
{{토막글|역사}}
 
[[분류:프랑스의 역사]]
[[분류:스페인의 역사]]
[[분류:독일의 역사]]
[[분류:영토 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