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키 헨더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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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구단 =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등번호 = 24 (영구 결번)
|선수 사진 파일명 = Rickey Henderson 2011 (New York Mets coachcropped).jpg
|사진 사이즈 = 250240px
|사진 설명 = 2011년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식 행렬에서
|국적 = 미국
|출신지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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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출방법 = BBWAA 선출
}}
'''리키 헨리 헨더슨'''(Rickey Henley Henderson, [[1958년]] [[12월 25일]] ~ )은 전 [[미국]]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야구]] 선수이다.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는 그의 등번호 24번을 영구 결번하였다결번 시켰다.
 
많은[[1979년]]부터 [[2003년]]까지 애슬레틱스를 시작으로 [[뉴욕 양키스]], [[토론토 블루제이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애너하임 에인절스]], [[뉴욕 메츠]], [[시애틀 매리너스]], [[보스턴 레드삭스]], [[로스앤젤레스 다저스]]까지 14년 동안 9개의 팀에서 뛰었으며, 빠른 발과 뛰어난 선구안으로 메이저 리그 역대 최고의 1번 타자로 손꼽히고 있다. 2009년 1월,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헌액이 확정되었다.
 
[[2009년]] [[1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 헌액이 확정되었다.
== 메이저 리그 시절 ==
[[파일:Rickeyhenderson2002.jpg|섬네일|왼쪽|리키 헨더슨]]
[[1979년]]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여,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에 [[좌익수]]로 입단하였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뉴욕 양키스에서 활약하였다.
 
== 초기 생애 ==
[[1995년]] 시즌 후에 [[샌디에고 파드리스]]와 계약을 맺었다가, [[1997년]] [[애너하임 에인절스]](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로 이적하였다.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헨더슨은 후에 [[1976년]]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 (캘리포니아주)|오클랜드]]에 있는 오클랜드 기술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3년 동안 야구에서 전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리그로 임명된 동안 거기서 그는 [[야구]], [[농구]]와 [[미식축구]]에서 뛰어났다. 자신의 시니어 해에 헨더슨은 미식축구 필드에서 1,100 야드로 돌진하여 대학들로부터 수십 개의 장학금 마련들을 모았다. 그는 [[1976년]] 애슬레틱스에 의하여 4번째 라운드에서 드래프트 되었을 때 대신 야구 경력을 위하여 선택하였다.
 
== 초기 경력 ==
[[1998년]] 시즌에 다시 애슬레틱스로 돌아왔다가, [[2003년]] 은퇴할 때까지 [[뉴욕 메츠]](1999), [[시애틀 매리너스]](2000), [[샌디에고 파드리스]](복귀, 2001), [[보스턴 레드삭스]](2002),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03) 등의 차례로 활약하였다.
[[1979년]] [[6월 23일]] 자신의 첫 프로 경기를 위하여 소집된 외야수는 89개 만의 경기에서 33개를 [[도루]]하였다. 아직 이 인상적인 시작은 다가오는 데 더 큰 성공의 기회 만이었다.
 
[[1980년]]부터 [[1984년]]까지 헨더슨은 자신의 놀라운 도루 능력과 함께 야구 팬들을 신나서 떠들게 하였다. 그 5개의 시즌 동안 그는 460개의 도루를 가졌다. 그는 1980년 자신의 2번째 프로 시즌 만에서 100 기본 점수를 명중하여 세자리 숫자의 도루 총계를 기록하는 데 야구 역사상 첫 선수가 되었다. [[1981년]] [[부상]]들이 그를 방해하였고, 그는 적당한 56개의 도루를 쌓았다.
[[2007년]]에는 [[뉴욕 메츠]]의 감독이 되었으며, [[2009년]]에는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 야구의 지배적 도둑 ==
그는 메이저 리그 야구 역사상 가장 많은 도루와 득점을 기록했다. [[1991년]]에 [[루 브록]]의 통산 도루 기록을 깼다. [[1982년]]에는 한 시즌의 130개 도루 기록을 세웠다. 또한 메이저 리그에서 3,000개의 안타를 친 선수들 27명 중의 한 명이다.
[[파일:Rickey Henderson and Eddie Murray, 1983.jpg|섬네일|왼쪽|[[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위하여 [[2루]]를 도루하러 가는 헨더슨 (1983년)]]
[[1982년]] 헨더슨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마스터 도둑으로 자신을 전환시켰다. 그는 130개의 도루와 함께 싱글 시즌 기록을 세웠다. 이어진 시즌에 그는 자신의 경력에서 3번째이자 최종적 100개 도루 상승 단계를 깼다. 그는 그 위업을 수행하는 데 단 1명의 [[아메리칸 리그]] 선수일 것이다.
 
헨더슨은 연습이 붐이 일어난 [[홈런]]의 매력에 의하여 소리가 지워졌을 때 당시 자신의 기록을 세우는 도루의 성취들이 왔다고 믿었다. 도루에서 세자리의 숫자를 칠 때 그는 [[루 브록]] 같은 본루의 길의 속력 악마들이 느리고 있을 때 당시 그렇게 해냈다. 〈베이스에서 : 도욱의 자백〉 책에서 헨더슨은 자신의 야구 믿음들을 표현하는 데 저자 [[존 셰이]]와 함께 팀을 이루었다. 헨더슨은 그 책에 "내가 리그로 들어올 때 루는 은퇴로부터 몇달이었다"라며 "[[버트 캄파네리스]], [[바비 본즈]]와 [[조 모건]]은 자신들의 경력을 감추고 있었다. 도루들은 죽어가고 있었고, 난 그것을 인생으로 도로 가져온 남자들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그 뿐만 아니라 난 도루의 예술을 다른 수준으로 밀고 나가는 데 결심되었다."라고 썼다.
도루 부문에서는 2위(루 브록, 938개)와 현격한 차이가 나는 올타임 1위(1406개)이며, 득점 부문도 2위(타이 콥, 2246점)을 앞서는 1위(2295점)이다. 통산 4할대의 출루율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57명의 타자만이 성공했는데 그 중 1번 타자는 리키 헨더슨 뿐이다. (참고로 통산 출루율 1위는 테드 윌리엄스(0.4817)이다.) 3천 안타를 기록한 28명의 타자 중 22위(3055안타)이다.
 
그는 [[텍사스 레인저스]]를 상대로 [[1983년]] [[7월]] 2개의 연속적 경기들에서 7개의 도루의 아메리칸 리그 기록을 동점 매기면서 그런 수준을 찾아냈다. 그해 [[8월]]까지 헨더슨은 이미 400개의 도루를 가졌다. [[1984년]] 헨더슨은 이전 시즌들이 수차가 아니었던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 시즌에 그의 66개 도루는 5연속 해를 위하여 아메리칸 리그를 얹었다. 그는 또한 [[뉴욕 양키스]]로 이적되기 전에 113개의 매긴 [[득점 (야구)|득점]]과 함께 아메리칸 리그에서 2위를 하였다.
야구선수 중 매우 드문 편인 좌투우타 선수인데, 원래 왼손을 쓰다 야구를 처음 배울 때 주변에 왼손 타자가 없어서 오른손으로 치는 것이 당연한 것인줄 알고 오른손 타자로 전향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왼손 타자였다면 더 많은 안타와 더 많은 도루를 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헨더슨의 구경 선수는 양키스와 함께 적합하는 데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1985년]] 헨더슨은 본루에는 물론 필드에 고정하였다. 자신의 [[안타]]가 향상되면서 리그에서 그의 평판이 그렇게 되었다. 그 시즌에 그는 80개의 도루를 가진 동안 당시 경력 사상의 24개의 [[홈런]]을 쳤다. 그렇게 하면서 헨더슨은 한 시즌에 20개 혹은 이상의 홈런을 치고 50개의 도루를 가지는 데 첫 아메리칸 리그 선수가 되었다. 추가적으로 그의 매긴 146개의 득점은 [[1949년]] [[조 디마지오]]가 150개의 득점을 매긴 이래 양키스 선수에 의하여 가장 많은 것이었다. [[5월 10일]]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상대로 헨더슨은 자신의 500번째 도루를 이루었다. 그의 [[여름]]은 그가 [[6월]]을 위하여 이번 달의 아메리칸 리그 선수로 임명되었을 때 겨우 나아졌다.
통산 0.982의 수비율로 커리어의 대부분을 좌익수로 뛰었으며 우익수와 중견수로도 잠깐 뛰었다. 아쉽게도 골든글러브<ref>골든글러브라 하는 KBO와는 달리 메이저 리그에서는 골드글러브라고 한다. 그리고 메이저 리그 골드글러브는 오직 수비만 가지고 시상한다.</ref>는 하나도 받지 못했다.
 
[[파일:Baseball steal.jpg|섬네일|오른쪽|헨더슨이 [[뉴욕 양키스]]의 선수로서 도루하는 모습]]
대단히 뛰어난 선수였지만 겸손하지 못했고 정신 세계도 괴상했기 때문에 동료들과 자주 충돌하는 스타일의 선수였다. 결국 한 팀에 오래 머물지 못하는 대표적인 저니맨이 되었고 총 13개의 팀을 옮겨다니면서 커리어를 쌓았다.
[[1986년]]부터 [[1990년]]까지 헨더슨의 통계는 변동하였다. [[1987년]] 수준적 야구 선수들을 위하여 경력 사상일 숫자인 41개의 도루를 그가 가지면서 부상들이 올스타 외야수를 괴롭혔으나 헨더슨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이전 해에 87개의 도루를 가진 후, 41개의 도루는 주요 하락으로 숙고되었다. 하지만 헨더슨은 자신의 500번째 [[타점]] (1988년 9월 13일), 자신의 700번째 도루 (1987년 9월 29일)과 자신의 1,000번째 경력 득점 (1988년 7월 17일) 같은 인상적인 이정표에 도달하였다.
 
경이로운 메모에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헨더슨은 부상 혹은 생산의 수들과 함께 자신을 염려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도루에 전념하였다. "베이스에서" 책에 헨더슨은 도루의 [[선종]]을 지적하여 "홈런을 치는 것이 최고력의 타자들을 위한 예술인 것 같이 도루는 예술이다"라며 지속적으로 "그것이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고, 당신은 실패하는 데 두려워 할 수 없다. 외부로 던져진 것, 그러고나서 내야수들이 공을 축하 중에 던지면서 전부 홀로 더그아웃으로 천천히 돌아가 걸어가는 것보다 최악적인 것이 없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제기랄, 내가 달리고 그들이 나를 꺾었다.'라고 생각하니 아픈 일이나 당신은 거기 밖으로 행진하여 다시 시도하는 데 신경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하였다.
 
== 기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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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
[[분류: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최우수 선수]]
[[분류:시카고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