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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라벤나 전투에서 스페인+교황령 연합군이 패배하면서 조반니 추기경은 프랑스군에 생포되었다. 다행스러운것은 전투에서 프랑스의 젊고 유능한 지휘관 가스통 드 푸아가 전사하며 프랑스군의 커다란 전력손실이 발생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한후 북이탈리아에서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프랑스로 끌려가던 조반니 추기경은 탈출에 성공하여 귀국할수 있었다.
 
1512년 8월, 프랑스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후 동맹국들이 만토바에 모여서 향후 이탈리아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때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였던 피렌체에 대해 응징을 결의하였다. 교황은 비록 지난 4월 라벤나 전투에서 조반니 추기경(훗날 교황 레오 10세)이 패배를 하였으나 과거의 약속이약속(피렌체에 대한 메디치가문의 통치권 회복)이 아직도 유효하다며 그를 교황군 특사로 임명한후 [[라몬 데 카르도나]]가 이끄는 스페인군과 함께 피렌체 정복을 명했다.
 
신성동맹군(교황령+스페인) 내부에서 이번 원정에 대해 반대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르비노 공작은 대포를 지원하지 않겠다고 하자 조반니 추기경이 대포를 직접 구입하여 보강하였다. 스페인군이 식량이 부족하다고 불평하자 그 비용을 지불하였다. 1512년 8월 하순에 신성동맹군은 볼로냐를 출발하여 피렌체 공화국의 영지인 [[프라토]](Prato)에 도착하였다. 프라토는 수도 피렌체에서 북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도시로 피렌체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이 함락되면 반나절만에 신성동맹군이 피렌체에 들어닥쳐 타격을 가할 수 있는 곳이였다.<ref>크리스토퍼 히버트 <메디치 가 이야기> 269 페이지</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