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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 대해 성무정지 조치를 내리자 프랑스는 이에 반발하며 교황에 대한 순명거부와 율리오 2세의 조속한 폐위추진을 선언한다. 이를 위해 1511년 11월 피렌체가 통치하고 있는 피사에서 공의회를 소집하였다. 1494년 이후 프랑스의 우방으로 캉브레 동맹전쟁중에 애매한 중립을 고수하던 피렌체는 공의회 개최를 수용하였고 교황은 이런 결정을 내린 피렌체 공화정 수뇌부에 대해 분노하였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응징할것을 다짐한다.
 
서방교회 대분열사건(1378-1417)으로 빚어진 서유럽의 대혼란이 콘스탄츠 공의회에 의해 해결된뒤, 교황권보다 공의회의 결의와 권위가 우위에 있다는 '공의회 수위설'이 대세로 떠오르던 시대였다. 따라서 교황치고 공의회 수위설을개최를 좋아하는 이가 없던 만큼 교황 율리오 2세 역시 자신의 폐위를 목적으로 개최되는 피사 공의회를 교황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이며 격노할수 밖에 없었다.
 
한편, 조반니 데 메디치 주기경(이하 조반니 추기경)은 교황으로 부터 교황군 특사로 임명받으며 프랑스군을 상대로하는 라벤나 전투(1512년 4월)에 참전하였다. 승리한다면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에 입성하여 피렌체의 통치권을 회복해도 좋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였다. 교황은 조반니 추기경에게 필승에 대한 강한동기를 부여하면서 동시에 1511년에 피사 공의회를 개최하여 자신을 분노케 만든 피렌체 공화정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했다. 조반니 추기경에게는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18년만에 자신의 출신 가문인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의 통치권을 되찾을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