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박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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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朴涇) - 자(字)는 사관(士官), 호는 연화당(蓮花堂), 중추부 동지사(종2품) 가선대부
*'''박세화'''(朴世華) - 자(字)는 매지(晦之), 호는 애송재(愛松薺).[[1679년]] ([[조선 숙종|숙종 5년]]) 문과 급제후 병조, 예조정랑(정6품)을 거쳐, 찰방(종4품) 등을 역임. 양아들인 3등 양무 공신 동형(東亨)이 [[이인좌]]의 일당인 박필현 부자를 토벌한 공으로 덕은군(德恩君)에 봉해졌고 사후 예조판서(정2품) 자헌대부 추증
[[파일:박동형영정.gif|섬네일|200px|1724년 영조의 명으로 충훈부 인각에 걸린 소와당 박동형(朴東亨)의 분무공신화상(奮武功臣畵像). 보물 1927 호]]
*'''박동형'''(朴東亨) - 자(字)는 수부(秀夫), 호는 소와당(笑臥堂), [[시호]]는 충효공(忠孝公). 상주 사람이다. 1695년 생으로 여렸을 적 같은 공주파(상주)의 거목인 박세화에게 입양됐다. [[1728년]] ([[영조|영조 4년]]) 음력 [[3월 15일]]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다. 그는 당시 상주진의 파총<ref>[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3026_013 조선왕조실록 영조편]</ref>으로 상주로 숨어든 역적 박필현 부자를 고변해 정공신이 됐다.[[파일:박동형교지.gif|섬네일|left|200px|박동형 양무공신교지(敎旨)]] 3등 분무공신에 중추부 동지사(종2품) 가선대부를 제수받고 충원군에 봉해졌다<ref>脚註-분무공신은 1764년(영조40년) 양무(揚武-)공신으로 개칭되었다. [[청나라]] 개국후에도 조선은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의를 기리기 위해 [[창덕궁]] 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홍무제|명나라 태조]]부터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종]]까지 제향했다. [[조선 영조|영조]]는 [[숭정제|의종]]의 휘호(徽號)에 분(奮-떨칠 분)자가 들어가므로, 이를 피해 분무(奮武)에서 같은 뜻의 양(揚-날릴,떨칠 양)자로 바꿔넣고 1728년 당시의 모든 교서와 녹권등에도 글자를 고치도록 했다</ref>. [[1733년]] ([[영조|영조 9년]]) 광양현감(종6품)을 시작으로 순천부사(정3품 당하관)등을 역임했다. 광양현감 재직 당시 전세(田稅)를 착오한 잘못으로 체포될 뻔 했지만 국법에 유죄(宥罪) 조항(너그러이 용서해 주는 것. 공신의 특권 중의 하나다) 덕에 별탈없이 넘어갔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9999_1_0030893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박동형편] {{웨이백|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c_A9999_1_0030893 |date=20131109004230 }} 본관이 반남으로 잘못기재되어 있으나 충주박씨임을 다른 자료에서 충분히 증명하였고 다만 공의 과실에 대한 부분을 살려 발췌함</ref>. 문과 급제는 못해 벼슬은 거기서 그쳤으나 공조판서(정2품) 자헌대부를 추증받고 영조가 친히 예장<ref>예장: 원래 종1품 이상의 대신이 죽을 때만 해주는 국가 장례</ref> 과 묘조<ref>묘조: 7대 이상의 조상과 합사할 수 있는 사당</ref> 를 내렸다. 부인은 경주 노씨. 박동형은 44세로 타계했고<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070901032530074002 '공신, 그의 후손의 가격까지 보장한 특권' -2012년 7월 9일 문화일보 최영창 기자]</ref> 그의 아들인 박완신(朴完臣)도 아버지의 공으로 대호군(종3품)에 오르고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ref name="분무공신 박동형집안 소장 공신문서류의 현황과 특징"/>.
*'''박종우'''(朴宗祐) - [[1746년]]([[영조|영조 22년]])생. 1802년(순조2년) 임술 정시에 병과 5위로 급제. 첨정(종4품) 조산대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