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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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천도와 남진 정책 ===
[[413년]], [[장수왕]]은 [[대흥안령 산맥|대흥안령]] 일대를 공격하는 한편, [[유연]]과 함께 지두우족을 분할 점령하려고 했지만 실패하였다. [[남조]]와 교류하면서 북조를 견제하였고, [[427년]](장수왕 15)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그러자 백제의 [[개로왕]]은 위협을 느껴 [[신라]]에 동맹을 요청하였고, [[433년]] [[신라|나]]·[[백제|제]] 동맹이 성사되었다. 게다가 개로왕은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간첩으로 보내며 백제 정복을 준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고, [[개로왕]]을 살해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14/2019051403605.html 백제 숨통 조였던 고구려 전초기지] [[조선일보]] [[2019년]] [[5월 15일]]</ref> 그리고 죽령(竹嶺)까지 차지하며 남진 정책을 펼쳤다. 고구려는 만주를 정복하여 대흥안령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당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확보하였다.<ref>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ref>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산맥|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유연과 함께 지두우족(현 몽골족)을 분할 점령하려고 한다.
 
중국 대륙의 [[남북조 시대|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북조를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평양]]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고구려'''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 (북조)|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북위에게 고구려를 공격해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북조의 사서에 적혀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위례성]]을 함락하여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고, [[개로왕]]을 살해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5/14/2019051403605.html 백제 숨통 조였던 고구려 전초기지] [[조선일보]] [[2019년]] [[5월 15일]]</ref>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를 정복하고 멀리 내몽고의 대흥안령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정복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국가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ref>고구려인이 스스로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를 통해 알 수 있다.</ref>
 
[[장수왕]] 대 이후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되었다.<ref>[[중원고구려비]]</ref>
 
=== 국력의 쇠퇴 ===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신라와 신라가백제는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북진을 영토 회복전에 나서,감행하였고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한편,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중국 대륙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ref name="threat">[https://www.donga.com/news/Opinion/article/all/20140218/60958791/1 고구려가 수-당과 벌인 90년 전쟁이 자기네 국내전쟁이라는 중국의 궤변] [[동아일보]] [[2014년]] [[8월 12일]]</ref>
[[파일:Goguryeo tomb mural.jpg|섬네일|왼쪽|[[무용총]] 수렵도.]]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영토 회복전에 나서, [[한강]] 유역을 빼앗았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또한 위·진·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 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722620{{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722620 }}</ref>
 
 
=== 수나라와의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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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에서 북제, 북주, 수나라, 당나라로 이어지는 무천진 선비족들은 2세기부터 중국인들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은 선비족과 경쟁하며 요동과 만주, 북연 등 중국인들을 정복하였는데 고구려보다 더 많은 남쪽의 중국인 한족들을 정복하여 예속시킨 [[수나라|수]](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정복하고 고구려에 친조를 요구하였다.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고 고구려인 강이식이 "칼로 대답하자" 하여 고구려와 [[수나라|수]]나라는 [[598년]]·[[612년]]·[[613년]]·[[614년]]에 전쟁이 있었다. 598년 고구려는 요서에 군대를 향하게 하여 요서를 선제 공격하여 정복하자 이를 계기로 수나라의 수 문종은 수나라군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반격하였다. 하지만 수나라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퇴각했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612년]] [[수 양종]]은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종는 내호아를 수군총관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을 공격하였고 수나라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요동성은 수나라군을 물리친다. 결국 수 양종은 [[우중문]]과 [[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청천강|살수]]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크게 패하고 죽었다([[살수대첩]]). 결국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은 수나라의 국력을 소진시켜 수나라는 멸망하였다.<ref name="getoutccp">[https://www.hankyung.com/life/article/2020030625141 동아시아 주도권 바꾼 '고·수전쟁'…고구려의 치밀한 준비 통했다] [[한국경제]] [[2020년]] [[3월 7일]]</ref>
 
=== 당나라와의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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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동북공정}}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2002년]]부터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국가적 프로젝트를 추진,추진하여 고구려 등의 역사를 [[중국사|중국 역사]]의 일부로 포함시키려는포함하려는 편향된 움직임을 보여준바보여주었다. 중국 [[둥베이|동북3성]]의 역사 문화를 연구하는 프로젝트로 시작된 [[동북공정]]은 사실 [[중국의 민족|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을 우려하는 중국이 [[조선족]] 이탈과 국경선 분쟁을 막기 위해 만든 국가 전략으로, 대표적인 역사 왜곡 있다사례다.
 
이에 [[대한민국]]에서도 고구려의 역사의 계승을 입증하기 위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서 [[2004년]] 고구려 연구재단을 설립하였으나, 2006년에[[2006년]]에 외교를 뒷받침하기 위해 설립된 [[동북아 역사재단]]에 통합되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한국 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주몽 (드라마)|주몽]]·[[연개소문 (드라마)|연개소문]] 등 고구려를 주제로 한 여러다양한 역사드라마가 방송되기도 하였다. [[2000년]]대 후반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공격은 고구려에서 빗겨난 [[발해|발해사]]에 집중되었다.
 
심지어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발해 역사를 중국 역사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족도 중국인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 일환으로 중국은 옌볜 조선족자치주에 `중국 조선족 애국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대문짝만하게 표지석까지 세우며 윤동주 시인을 중국인화하고 있다.<ref name="getoutcha">[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19/09/747606/ 반일 종족주의와 동북공정] [[매일경제]] [[2019년]] [[9월 20일]]</ref>
2000년대 후반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의 화살은 고구려에서 빗겨난 [[발해]]사에 집중되었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