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낭 브륀티에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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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브륀티에르는 미국으로 강연을 하러간다. 브륀티에르는 1900년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브륀티에르는 본질적으로 17세기 이성주의적 고전주의의 지지자였으며, 그런 고로 동시대 문학 조류들과는 가끔은 심할 정도로 반목하였다. 브륀티에르는 [[귀스타브 플로베르]]와 (특히 플로베르의 <세 가지 이야기>에 대하여) [[졸라]]에 반대하는 (<자연주의 소설>에서)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1892년에는 [[샤를 보들레르]]의 동상을 세우는 계획에 반대하여 항의하기도 했다. 브륀티에르는 당대의 주류였던 과학만능주의에도 적대적이였는데, 이 같은 이유로 그는 동시대보다 [[옥타브 미라보미리보]]같은 무정부주의자의 시대에시대로 더 다가갔다.
 
반드레퓌스파였으나,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던 (그는 1886년 <르뷔 데 되 몽드>에서 반유대주의자 [[에두아르 드뤼몽]]이 쓴 <프랑스 유대인>을 강하게 반박했다) 브륀티에르는 1898년 드레퓌스파 지식인들이 자신들의 전문 분야가 아님에도 드레퓌스 문제에 관하여 전공 영역을 벗어나서 논하는 것을 비난했다. 브륀티에르의 친구이자 드레퓌스파이던 플로르 생제는 몇 차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브륀티에르의 입장을 바꾸고자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