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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초의 제작 방법과 생김새 ==
중통원보초의 재료는 뽕나무 껍질로, 섬유 모양으로 만든 내피에 [[아교]]를 섞어 얇게 펴서 세로로 자르고, 동판화로 인쇄하여 황제의 옥새를 날인하였다. 중통원보초에는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용이나 동전의 도안, 액면가, 발행소, 발행소의 관리 이름, 제조소, 그리고 위조하는 자는 참살한다는 경고 문구가 인쇄되었다. 이러한 교초 제작 형식은 후세 국가의 지폐에도 영향을 끼쳤다.<ref>植村 (1994) p.10-11</ref> 중통원보초의 크기는 272×188mm, 지원교초의 크기는 300×222mm로 정해져 있었다.<ref>植村 (1994) p.14</ref>
 
== 영향 ==
금은이나 동과 같은 금속이 아니라 종이 혹은 천으로 제작하고 통용되는 화폐라는 개념은 중세 유럽이나 이슬람 세계로부터 온 자들을 놀라게 했다. [[13세기]] 말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録)이나 [[피렌체]] 출신의 상인 프란체스코 발두치 페골로티(Francesco Balducci Pegolotti)가 [[1330년]]대 무렵에 편찬한 《통상지남》, 마그레브 출신의 [[이븐 바투타]]가 집필한 《여행기》 등에서 교초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ref>(일본어) 齊藤寛海 「[http://pacioli.world.coocan.jp/AAAJ/AAA_No.24_2011_12.pdf ペゴロッティの商業実務とバドエルの元帳]」 日本パチョーリ協会第23回フォーラム、2011年。</ref>
 
현대의 이란을 중심으로 하는 몽골 정권이었던 [[일 칸국]]은 교초를 본따서 [[1294년]]에 챠브(초鈔)를 발행하였는데, 이것이 서아시아 최초의 지폐였다. 교초를 참고로 하였기 때문에 표면에는 한자도 인쇄되었고, 당시의 일 칸국의 군주였던 [[가이하투]]는 금속화폐를 대신해 챠브를 유통시켰다. 그러나 챠브는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지 두 달 만에 회수됐고, 이는 가이하투 자신의 권위 실추로까지 이어졌다.
 
원 왕조가 멸망하고 세워진 명(明) 왕조에서도 마찬가지로 동 부족 문제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1368년]]에 지폐 대명보초(大明宝鈔)를 발행한다. 명 왕조는 보초를 국내용 통화로 정하고 동화를 교역용 화폐로 했다. 그러나 보초는 증쇄 발매로 인해 가치가 떨어져서 초 1관이 동화 1, 문 정도까지밖에 안 되게 되었기 때문에, [[명 영종|영종]](英宗) 시대에는 동화나 평량은화의 국내 사용도 해금되었다.<ref>湯浅 (1998) p.340-342</ref>
 
== 참고 문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