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펠럼: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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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744년 11월 의회 소집 직전 펠럼이 조지 2세에게 카터렛의 경질을 상주하여 국왕에게 억지로 해임을 인정하게 했다. 이에 따라 정부 내에서 펠럼은 총리로서의 지위를 확고하게 구축하였다. 같은 해 말에는 토리당 일부를 포함하여 야당에서도 인재를 널리 등용한 개각을 했다. 이렇게 토리를 배려하는 태도에 대해 의회에서도 광범위한 지지를 얻는데 성공했다. 또한 월폴 이후 휘그당은 작은 파벌 집단으로 분열되고 있었지만, 유력한 반대당이 출현할 수 없었던 것도 그의 정권 안정에 기여를 했다. 한편 황태자 [[웨일스 공 프레더릭|프레데릭 루이스]]에게 많은 불만분자들이 줄을 섰지만, 그 자신도 별로 활발한 반정부 운동은 하지 않았고 오직 즉위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1745년부터 1746년에 걸쳐 일어난 [[자코바이트 반란]]도 신속하게 진압했다.
 
그러나 그동안 조지 2세와 펠럼의 갈등은 깊어지고 있었다. 그랜빌 백작 (카터렛)은 사직한 뒤에도 왕의 정책 자문을 계속하였고, 국정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따라서 의회의 지지를 받는 ​​공식적인공식적인 총리(펠험)와 국왕이 중용하는 그림자 총리(그랜빌 백작)는 ‘이중 내각’ 상태가 될 위험이 높아졌다.
 
1746년 2월에 이런 대립이 깊어지자 국왕은 펠럼이 윌리엄 피트를 등용하자는 장관 인사안을 거부했다. (윌리엄 피트도 하노버 우선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왕의 미움을 사고 있었다.) 대신 국왕은 그랜빌 백작을 수반으로 하는 내각 수립을 획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왕의 구상은 의회 정치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무산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국왕은 펠럼에 완전히 굴복하는 처지가 되었고, 윌리엄 피트 등용도 실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으로 ‘국왕이 휘그당 정치인들에게 부당하게 끌려다닌다’는 신화를 강화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