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의 역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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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후안 곤살레스 데 멘도사는 1585년 출판된 〈차이나 대왕국지〉( Historia de las cosas más notables, ritos y costumbres del gran reyno de la China)에서 당시 필리핀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에서 필리핀에 [[비단]]과 [[도자기]] 등이 매우 싸게 들어오고, 필리핀에서 중국으로 금 제품과 스페인 은화 등이 지급되었다.<ref name=matsu>松浦章『[http://www.icis.kansai-u.ac.jp/data/journal01-v2/journal01v2-05-matsuura.pdf 近世東アジア文化交渉と中国帆船]』、2007年、[http://www.icis.kansai-u.ac.jp/paper01s.html 東アジア文化交渉研究]</ref> 또한 명대의 문인 장섭은 1617년 〈동서양고〉(東西洋考)에서 "필리핀에서 들어온 물건에 필리핀 산은 하나도 없고, 오랑캐의 은화뿐이다"라고 적고 있다.<ref name=matsu/>
스페인들이 들어온 직후 침투한 화폐 경제로 원주민들은 금세 거주지를 빚 대신 주었고, 스페인 정착민도 늘었다. 1578년에는 인근의 유력한 [[이슬람]] 국가인 [[브루나이]]가 [[스페인]]에게 패하면서 이슬람 세력의 힘이 약화되었다. [[1587년]]에 마닐라 근교에서 수장들이 반란을 계획했지만, 이듬해 발각되어 몇 명이 교수형을 당했다. (톤도의 모의) 당시 스페인에서 포교하고 있던 가톨릭 교회는 스페인 본국에서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주인선 무역이 이루어져 일본이 스페인 상인을 상대로 하는 무역이 발전했다. 무역에 종사하는 많은 일본인들이 동남아로 옮겨 각지에서 일본인 마을을 형성되었고, 필리핀 마닐라 등에도 일본인 마을이 만들어졌다. 1570년에는 20명 정도였던 일본인 거주자도 17세기에는 1500명, 전성기에는 3000명이나 되었다. 영주였던 타카야마 우콘도 일본에서 추방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1633년부터 순차적으로 시행된 일본의 쇄국령으로 이러한 도시는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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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milio Aguinaldo (ca. 1898).jpg|150px|left|섬네일|필리핀 초대 대통령, [[에밀리오 아기날도]]]]
[[파일:Bandera 03.jpg|220px|섬네일|[[필리핀 혁명군]]의 깃발]]
1892년에 [[호세 리잘]] 체포를 계기로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등에 의해 비밀 결사 단체인 [[카티푸난]]이 결성되었다. 본국 정부에 대해 급진적인 자세를 취하던 카티푸난은 1896년 무력 봉기를 결행했다. 그러나 스페인 정부는 같은 해 [[호세 리잘]]을 처형하고 본국에서
=== 미국-스페인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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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민심을 회복하기 위해 [[1943년]] [[10월 14일]], [[호세 라우렐]]을 대통령으로 하는 필리핀 제2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일본은 라우렐 정권과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형식면에서는 일본의 군정을 끝냈다. 라우렐 대통령은 11월에 도쿄에서 개최된 대동아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라우렐 정권은 필리핀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없었다. 또한 라우렐 정권은 전쟁에서 지주 지배의 계속을 인정했기 때문에 필리핀 친일 세력의 이반을 초래하였고, 라우렐 정권 측도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하는
===연합군의 필리핀 탈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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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부정 선거로 재선된 마르코스는 두 조직의 반란을 이유로 1972년에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내걸고 국회를 해산하고, 기존 지배층을 배제하고, 군대가 정부 기능을 장악했다. 마르코스 정권의 농지 개혁은 실효성을 가지고 자작농 생기고, 쌀 자급도 어느 정도 가능하게 되는 등의 성과가 있었다. 외국 자본의 적극적 도입을 골자로 한 경제 정책으로 1970년대를 통해 연평균 6-7%의 GNP 성장을 달성했다.
[[1975년]], 마르코스는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국과의 국교를 수립하였다. 1976년에는 [[소련]]과 국교를 수립했다. [[모로민족해방전선]]과도 잠정 평화 협정(트리폴리
===피플 파워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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